성탄절인 25일에도 국회 본회의장에는 평화가 깃들지 않았다. 공직선거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가 사흘째 계속된 이날, 여야 의원들은 막말과 고성을 주고 받으며 국민은 안중에 없는 ‘그들만의 전쟁’을 치렀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주요 타깃은 더불어민주당 주도의 선거법 기습 상정에 ‘협조’한 문희상 국회의장이었다. 24일 밤 7번째 토론자로 나선 전희경 한국당 의원은 단상에 서자마자 “저 뒤에 계신 의장님을 향해 ‘존경하는’이라는 상투적 수식어도 붙일 수가 없다”며 문 의장을 저격했다. “정치인생을 반추하라”는 전 의원의 말에 문 의장이 발끈하자 한국당 의석에선 반말투의 항의가 터져 나왔다. 문 의장은 “지금 뭐라고 하셨나”라며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25일 6시간 가까이 필리버스터를 이어 간 박대출 한국당 의원은 문 의장을 겨냥해 “별명이 ‘장비’로,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처럼 신의 있고 합리적인 성품을 가진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장비가 동탁이 돼버렸다”고 비꼬았다. “의회 쿠데타의 주모자” “청와대 출장소 소장” 등 노골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선거법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인물들이 난 데 없이 등장하기도 했다. 11번째 토론자로 나선 정유섭 한국당 의원은 “이쯤에서 박 전 대통령의 형을 집행 정지해 달라”고 말했다. 민주당 의원들의 야유가 쏟아졌지만, 정 의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감기간이) 1,000일 정도인데, 여자 대통령에게 증오로 복수해야 하겠는가. 박 전 대통령에게 뭐 이렇게 복수할 게 많은가”라고 따졌다. 강병원 민주당 의원은 “탄핵을 유일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집단이 한국당 아닌가”라며 논점 일탈의 토론을 이어갔다. 토론 도중 의원들끼리 대화를 나누거나 엎드려 잠을 자는 모습도 빈번하게 목격됐다.
이처럼 품격 없는 ‘밥그릇 필리버스터’는 3년 전 국가 안보와 국민 인권이 걸린 ‘테러방지법’을 놓고 진행됐던 필리버스터와도 비교된다. 은수미 당시 민주당 의원은 정의화 국회의장에게 테러방지법 직권상정 철회를 요청하면서도 “의장님의 고뇌를 모르는 바 아니나 혹여 이 직권상정으로 전 국민 대테러방지법이 통과될 경우 그것이 국민감시법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우려가 너무 크다”며 근거를 들어 설득하려 애썼다. 정 의장은 은 의원이 10시간이 넘는 반대 토론을 마치자 “(은 의원을) 부축 좀 해달라. 아마 다리가 힘들 거다”고 위로하기도 했다.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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