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종범 아들 이정후와 이병규 아들 이승민
※ 어린 운동 선수들은 꿈을 먹고 자랍니다. 박찬호, 박세리, 김연아를 보고 자란 선수들이 있어 한국 스포츠는 크게 성장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여전히 스타의 발자취를 따라 걷습니다. <한국일보>는 어린 선수들이 자신의 롤모델인 스타를 직접 만나 궁금한 것을 묻고 함께 희망을 키워가는 시리즈를 격주 목요일 연재합니다.
‘바람의 손자’ 이정후(21ㆍ키움)는 2017년 프로 데뷔 후 수 차례 아버지 이종범(49)의 이름을 소환했다. 데뷔 첫해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신인왕을 차지했고, 2018년 자카르타ㆍ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코치와 선수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해는 프로야구 최초의 부자 포스트시즌 최우수선수(MVP)라는 진기록도 세웠다. 이정후가 순탄한 행보를 이어간다면 한국 야구 사상 가장 성공한 ‘부자’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이정후의 성공 사례는 청출어람을 꿈꾸는 야구인 2세에게 큰 힘이 됐다. 아마 야구계에서 주목하는 ‘리틀 적토마’ 이승민(14ㆍ휘문중) 역시 ‘제2의 이정후’를 꿈꾼다. 레전드 출신 이병규(45) LG 타격코치의 아들 이승민은 왼손 타자에 타격 폼, 장타력까지 아버지를 쏙 빼 닮았다는 평가다. 취미로 야구를 시작했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정식으로 야구 선수의 길을 택했다. 신체 조건도 185㎝, 85㎏로 건장한 체격이다.
야구인 2세라는 공통 분모에 휘문중 선ㆍ후배 사이인 이정후와 이승민은 서로 마음이 잘 통했다. 이정후가 모교를 찾을 당시 종종 인사를 나눴던 사이지만 지난 17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둘만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정후는 “체격이 내 중학교 시절보다 훨씬 좋다”며 “박만채 감독님을 비롯해 코치님들이 그대로 계시는데 감독님이 배팅과 수비 모두 나보다 (이)승민이가 잘한다는 얘기를 했다고 들었다”고 후배의 기를 살려줬다. 이승민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 동반 모임에서 (이)정후 형이 나온다고 해서 따라 나가 처음 만날 당시엔 쑥스러워서 말도 잘 못 걸었다”며 “하지만 이제는 물어보고 싶은 걸 적어뒀다가 형을 만날 기회가 되면 꼭 물어본다”고 웃었다.
이승민이 수 많은 선수 중 이정후를 롤모델로 삼은 계기는 무엇일까. 이승민은 “넥센 시절 프로 첫 타석부터 정후 형의 경기를 다 봤는데, 다부지게 야구하는 모습이 보였다”며 “특히 신인 선수라고 생각 못할 정도로 타석에 들어설 때 상대 투수에게 지지 않으려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고 고백했다.
이에 이정후는 “원래 눈빛이 그렇다”면서 “상대가 전부 선배들이고, 외국인 선수를 상대하는 것도 처음이라 기부터 지고 들어가면 다 질 것 같았다. 난 잃을 게 없으니 ‘기 싸움에서라도 이기자’라는 생각으로 타석에 섰다”고 설명했다.
야구인 2세로 겪는 고충을 이정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스스로 이겨냈다. 2세들은 부모로부터 ‘운동 DNA’를 물려받지만 전부가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받는 것은 아니다. 또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벽과 마주한다. 특히 스타 출신 아버지를 둔 아들이라면 늘 아버지와 비교 대상이 된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중압감이다.
이정후는 경험을 바탕으로 이승민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아빠가 유명하면 야구하기 쉽지 않은데, 승민이가 잘하고 있는 걸 보면 내 어린 시절도 떠오른다”며 “앞으로 중학교 3학년, 고등학생이 되면 더 비교되고, 주위에서도 많은 얘기를 듣고, 스트레스가 될 테지만 우리가 이 길을 택한 이상 어쩔 수 없다. 이런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한다. 스트레스 받으면 스스로에게 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 초등학생들은 아버지를 잘 모를 거다. 그러니까 승민이가 야구를 잘하면 아버지 이름이 알려지고, 어린 친구들도 너로 인해 아버지가 어떤 선수였는지 알게 되면 좋은 거잖아”라며 “살아가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다. 네가 좋아하는 야구를 그냥 하면 되는 거야”라고 긍정적인 자세를 주문했다. 이승민은 “맞아요. 다른 사람 의식하면 자기가 할 것도 잘 못해요. 마냥 좋은 야구 열심히 해서 4년 뒤에 우리 프로에서 만나요”라고 답했다. 이 말에 이정후는 “그 때면 내가 자유계약선수(FA)일 수 있는데…”라며 웃어 넘겼다.
이날 이승민은 휴대폰에 평소 궁금했던 것을 가득 적어 막힘 없이 질문했고, 이정후는 마음을 담아 답했다. “득점권에 어떤 생각으로 타석에 들어가나요(이승민)?”, “무조건 내가 쳐야겠다는 마음을 버려야 돼. 투수는 좋은 볼을 안 주려 할 거고, 타자는 쳐야 하니까 조급해진다. 볼 카운트가 유리하면 내가 좋아하는 코스, 구종을 던지게 돼 있으니 그게 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해(이정후).”
“동계 훈련 때 마음가짐과 식단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이승민)?”, “운동할 때 힘들면 내년에 하고 싶은 목표를 생각하면서 했어. 예를 들면 ‘돈 많이 벌어야지’, ‘200안타 쳐야지’ 등의 주문을 하고 버텼어. 식단 관리는 잘 안 하고 무조건 많이 먹어. 지금 84㎏인데, 살을 찌워놓으면 시즌 때 빠지지 않고 그대로야. 선수마다 맞는 몸무게가 있지만 이건 프로에서 배우니까 승민이 나이 때는 많이 먹어도 돼(이정후).”
“야구하면서 힘들었던 적은 언제였고, 어떻게 이겨냈어요(이승민)?”, “난 한번도 힘든 적이 없었어. 꿈이었던 프로 선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즐거워. 중ㆍ고교 시절에도 그냥 친구들하고 운동하는 자체가 재미 있었어. 같이 경기에서 승리하고, 고기 먹고, PC방에 가는 게 기억에 남아. 야구가 안 된다고 혼자 이겨내려고 하지 말고 친구들을 잘 이용해야 돼(이정후).”
시간 관계상 이승민이 준비한 질문은 다하지 못했다. 구단 공식 행사에 참가할 시간이 다가와 아쉽게 발걸음을 옮기게 된 이정후는 “잠깐 기다려 봐”라는 말과 함께 라커룸으로 뛰어가 자신의 배트를 이승민에게 선물했다. 깜짝 선물을 받은 이승민은 “좋은 기운을 받았다”며 활짝 웃었다.
김지섭 기자 onion@hankookilbo.com 이주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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