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낙연 국무총리의 역할론이 새삼 뜬 건 문재인 대통령 덕이다. 차기 총리 후보자로 정세균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지명한 17일, 진짜 주인공은 이 총리였다. 문 대통령은 “이 총리님이 내각을 떠나는 것이 저로서는 매우 아쉽지만, 국민으로부터 폭넓은 신망을 받는 만큼 ‘자신의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놓아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제 자기 정치를 하라’는 전폭적 지지를 보낸 것이다. 차기 총리 후보자 지명 발표장에서 내놓은 매우 이례적인 발언이다. 벌써부터 여당은 이 총리에게 맞는 옷을 찾느라 분주하다.
□ 박근혜 전 대통령도 ‘자기 정치’를 입에 올린 적이 있다. 2015년 6월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이 야당과의 협상에서 공무원연금 개혁안 처리 합의를 받아내고 국회법 개정안 처리를 수용했을 때다. 그는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하며 독기 서린 어조로 “정치는 민의를 대변하는 것이지 자기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자기 정치를 하는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 달라’는 얘기였다. ‘비박’의 구심으로 박근혜 정부의 노선을 비판해 눈엣가시였던 유승민 원내대표를 겨냥한 말이었다. ‘친박’ 의원들은 즉각 유 원내대표를 끌어내렸다. 한 의원은 당시 친박의 모습을 ‘물고 뜯는 승냥이떼’에 비유했다.
□ 여의도에서 구전되는 오랜 금언 중에 이런 게 있다. ‘모든 초선 의원의 꿈은 재선이고, 모든 재선 의원의 꿈은 대통령이다.’ 우스갯말 같지만, 이 문장에는 재선만 해도 자기만의 정치 철학과 신념, 꿈이 생긴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자기 정치는 형용 모순이다. 공적인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행한다면, 본디 정치는 자신이 하는 자기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정치는 자기의 자치 영역을 지닌다”고 말했다.
□ 공교롭게도 전ㆍ현 대통령이 자기 정치를 입에 올린 건 임기 3년차 때다. 이듬해 총선을 앞뒀다는 시점도 비슷하다. 이 총리는 현재 지지율 1위의 차기 대선주자고, 유 의원 역시 보수 진영의 유력한 잠룡이었다. 차이라면 문 대통령은 이 총리 지지에, 박 전 대통령은 유 의원 찍어내기에 자기 정치 언급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둘 다 정권의 수성(守城)을 위한 정무적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대통령들이 특정인을 두고 거론한 자기 정치라는 말에 진짜 자기 정치가 숨어있다는 게 흥미롭다.
김지은 논설위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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