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당 주호영 포문 열었지만 민주당 김종민도 기습 신청
“다수당 횡포 막는 취지 훼손” 안팎에서 비난 목소리 이어져
기저귀 차고 사탕 먹으며 토론… 일부는 관례 깨고 화장실도
더불어민주당은 2016년 2월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의 테러방지법 추진에 반발해 192시간 동안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방해)를 했다. 필리버스터는 다수당이 국회에서 ‘수(數)의 힘’으로 법안을 일방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소수당이 견제할 수 있게 한 장치다. 법안 통과를 끝내 막을 순 없겠지만, 반대 논리를 알릴 기회를 주자는 취지다. 현재의 무제한 토론 방식은 2012년 여야 합의로 도입됐다.
여당이자 원내 다수당이 된 민주당은 약 4년 만에 필리버스터의 취지를 무너뜨렸다. 한국당의 ‘선거법 저지 필리버스터’에 민주당이 가세하면서다. 법안 반대자가 아닌 발의자이자 찬성자가 필리버스터에 나선 것은 유례 없는 일이다.
한국당은 23일 밤 국회 본회의에 ‘4+1’ 협의체(민주당ㆍ바른미래당ㆍ정의당ㆍ민주평화당+대안신당)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상정되자 마자 주호영 의원을 필두로 필리버스터를 시작했다. 같은 당 권성동 의원이 필리버스터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됐지만, 두 번째 주자는 김종민 민주당 의원이었다. 민주당이 필리버스터를 기습 신청한 탓이다. 국회법상 재적 의원 3분의 1이 서명한 요구서를 제출하면 누구나 필리버스터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발언 도중 다음 토론자가 김 의원이란 사실을 알게 된 주 의원은 5초간 말을 잇지 못했다. 주 의원은 “찬성 토론으로 필리버스터 하는 경우가 어디 있나. 앞으로 필리버스터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됐다”며 허탈해했다. 김종민 의원은 단상에 올라 선거법 찬성 논리를 펴는 데 열을 올렸다. 민주당 최인호, 기동민, 홍익표, 강병원, 김상희 의원과 정의당 이정미 의원도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 김재원 한국당 정책위의장은 이들을 “장례식에 와서 춤 추는 분들”에 빗대기도 했다.
민주당은 “선거제 개혁의 진정성과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누더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선거법을 스스로 후퇴시킨 민주당이 뒤늦게 ‘개혁’을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도 무성하다. 한국당 관계자는 “민주당의 유일한 목표는 우리 당을 힘으로 눌러버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병민 경희대 행정학과 객원교수는 “필리버스터는 다수당의 표결 강행에 맞서 찬성 표결을 지연시키는 것이 취지인데, 법안을 찬성하는 쪽에서 무제한 토론에 나서는 것은 난센스이자 20대 국회를 희화화시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여야가 고작 ‘밥그릇’이 걸린 법안을 놓고 필리버스터를 한다는 것 자체도 아름다운 장면은 아니다.
여야는 24일 이틀째 릴레이 필리버스터를 이어갔다. 그러나 필리버스터의 명분 자체가 훼손된 탓에 민심의 주목도도, 참여자들의 긴장도도 확 떨어졌다. 4년 전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참여자들이 9, 10시간 가까이 토론을 계속하는 등 사활을 걸었던 것과 대비된다. 당시 최장 시간 토론 기록은 이종걸 전 민주당 원내대표(12시간 31분)가 썼다. 반면 이번 선거법 토론자들은 3, 4시간만에 단상에서 내려갔다.
김종민, 권성동 의원은 발언 도중 양해를 구하고 3분 간 화장실을 다녀오기도 했다. 필리버스터 도중 회의장을 비우면 ‘토론 종료’로 간주되는 것이 대체적 관례였지만, 이번엔 깨진 것이다. 다만 주호영 의원은 기저귀를 차고 토론에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 의원은 토론 도중 손으로 어깨를 마사지하거나 사탕을 먹으며 3시간 59분간 토론을 이어갔다.
정승임 기자 choni@hankookilbo.com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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