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의 글과 말에 기함하는 일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이번 칼럼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는 더욱 여러 사람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성탄절을 앞두고 한 해를 마무리 지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해야 마땅할 세밑 무렵에 1등 신문이란 데서 들을 소리는 아니었다. 늙음과 젊음 또한 상대적 개념이고 생물학적 출생연도로만 따질 게 아니라서, “늙어봤냐” 하는 물음에 답변은 보류하겠다. 딱히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젊어봤단다” 하는 자랑(?)에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축하합니다. 그런데 어쩌라고요.
승용차에 붙이는 스티커 문구 “아이가 타고 있어요.”에서 “18세 선거권 유감”으로의 점프를 단번에 해내는 문장의 운동신경도 놀랍지만 선거로 상징되는 대의민주주의를 거부하고 “12명으로 구성된 ‘현자 회의’가 통치하는 나라에 살고 싶다”는 대목에서는 뒷목을 잡게 된다. 스스로도 괴이쩍은지 “미치지 않은 이상 오죽하면”이라는 단서를 붙이고는 있지만, 이미 뱉은 말이 사라지진 않는다. 뒤이어 애꿎은 ‘꼰대’를 호출하는데, 나는 저런 말을 하는 꼰대를 만나 본 적이 없다. 제발 꼰대의 일반화를 멈춰 달라. 누구나 가슴 속에 꼰대 한 명은 있지 않겠는가.
약간의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칼럼에서 이러저러한 수식과 감정의 배출을 걷어내고 보자면 ‘만 18세 미만 선거권’에 대한 강력한 반대가 그의 주된 논지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18세라면 대다수가 아직 고등학교 3학년에 불과하기 때문에 학교의 정치화가 우려된다는 주장에 다소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 정치화되지 않은 곳은 없다. 학교의 정치화는 안 되는데, 교회는 왜 괜찮은가. 교회의 신자는 젊어봤기 때문에? 학교 일선의 어려움이야 있겠지만 선거권이라는 국민의 권리를 박탈할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고등학교가 가장 고도로 정치화되었던 시기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반공사상을 주입받고 교련 수업을 받던 박정희 정권하에서다. 외국 정상이 방한했을 때 공항에까지 동원되어 국기와 꽃을 흔들던 학생들도 정치화의 일환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게 지금 스스로를 늙었다고 지칭하는 이들이 젊을 때 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슬프고 안쓰러운 마음도 없지 않아 든다.
이에 비해 실제 선거라는 행위는 정치의 심화가 아닌 자유의 확대로 봐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대표를 제 손으로 뽑을 권리와 자유가 있다. 투표권은 물론이고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자유까지 폭넓게 청소년에게 주어져야 한다. 나아가 더 어린 청소년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져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지금 10대 후반 청소년들의 판단력과 정보력을 의심하기는 어렵다. 솔직히 그런 의심은 다른 세대에게 더 강력하게 적용될 수도 있겠지만. 선거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히 한 표씩 주어져야 하고, 앞선 의심은 누구에게나 비민주적이다.
헌법은 대의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진심은 아니었겠지만 ‘12명이 현인 통치’ 운운은 위헌적인 발상이다. 헌법은 또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있음을 명시한다. 4·19는 당시 고등학생이 주도했고, 그들을 우리는 4·19 세대라 부른다. 그들이 젊어봤을 때에 일어난 일이다. 그 덕에 ‘포퓰리즘 면역 항체’니, ‘매표 파티’니 하는 말도 할 수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여러 세대의 여러 사상과 문화가 힘을 썼을 것이다. 그 ‘늙음’의 어떤 면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또한 어떤 면은 그렇지 못하다. “선거 똑바로 해라.”라는 일갈은 서로가 서로에게 언제든 할 수 있는 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에서는 놀랍게도 모두가 현자다. 젊어봤던 당신도, 곧 늙을 우리도, 그리고 18세 청소년들도.
서효인 시인ㆍ문학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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