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가 국가 부도 지경에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지원 양해각서에 서명(1997년 12월 3일)하기 꼭 1년 전인 1996년 12월 26일, 의회 헌정사상 최악의 오점이자 한국 노동운동사의 분수령이 된 노동법 날치기 통과 ‘사건’이 일어났다. 김영삼 문민정부의 거대 여당 신한국당 의원 154명(총 157명)이 이날 새벽 5시 50분 관광버스로 집단 등원, 단 7분 만에 노동법 개정 법안과 안기부법 등 11개 법안을 기습 통과시킨 거였다.
1995년 첫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여당 민주자유당은 12월 당명까지 신한국당으로 바꾸고, 이듬해 4월 총선을 치렀지만 오히려 7석이 줄어든 139석에 그쳤고, 선거 후 무소속과 민주당 자민련 의원들을 영입해 간신히 과반을 넘겼다.
경제 위기는 정치적 레임덕을 가중시켰다. 무역수지 악화와 단기 외채 급증, 기업 경영 악화에 따른 금융기관 부실 징후들이 연쇄적으로 드러났다. 거기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위한 김영삼 정부의 원화가치 절상 드라이브로 외환보유고도 격감했다. 외환 투기자본의 입장에서 한국은 손쉬운 먹이였다.
노동법 날치기는 저 위기에 대해 문민정부가 내놓은, 선제적인 처방인 셈이었다. 친기업ᆞ신자유주의 투자 기반을 조성해 외자를 유치하고, 이른바 선진적 경제구조를 구축하자는 복안. 그 골자가 정리해고제, 변형 근로시간제(비수기 근무시간을 줄이고 성수기에 늘려 초과수당을 최소화하는 방편), 파업 대비 대체근로제, 제3자 개입 금지, 노조 정치활동 금지였다.
총파업은 이듬해 1월 17일까지 23일간, 노동자 약 210만여 명이 참여해 벌인 사상 최대ᆞ최장 기간 이어졌고, 이후 노동 진보정당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날치기 파동은 문민정부의 레임덕을 가속화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2월 17일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고, 3월 임시국회는 여야 합의로 정리해고제 2년 유예 등 완화 법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이듬해 IMF 사태로 인한 초유의 기업 도산ᆞ실업사태를 맞이했고, 96년 노동법의 골자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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