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 문제에 천착해 ‘블루칼라의 시인’으로 불리는 영국 켄 로치 감독의 신작 ‘미안해요, 리키’는 불안정한 장시간 노동의 굴레에 묶인 영국 노동계급의 현실을 고발한다. 주인공은 미국발 금융위기로 실직한 뒤 이 직업 저 직업을 떠돌다 택배기사가 된 리키와 요양보호사인 애비 부부. 리키는 계약서상 사장이지만 권리는 전무하고 의무만 짊어진 플랫폼 노동자이고 아내 애비는 일한 시간만큼만 임금을 받는 ‘0시간 계약(zero-hours contracts)’을 맺은 임시직 노동자다.
□ 퀵서비스 기사, 택배 기사 등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권 보호 논의는 활발하지만 그때그때 사용자 호출에 응해야 하는 ‘0시간 계약 노동자’의 노동권 문제는 소홀히 취급돼 왔다. 영화에서 애비는 오전 7시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치매노인 집들을 방문해 이들을 돌보느라 녹초가 되고 늦은 귀가에 자녀들은 엇나간다. 이동시간은 근무시간에 포함되지 않아 이동할 때마다 발을 동동 구르고, 휴일에도 맘놓고 쉴 수 없다. 2000년말 22만5,000명이던 영국의 0시간 계약 노동자는 올해 6월 89만6,000명으로 4배 늘었다.
□ 늘어나는 0시간 계약 노동자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급여명세서 지급 의무화, 최소 4주 전 근무조 공지 등 대책을 세운 영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변변한 실태 조사는 언감생심인 가운데 유사 탈법 고용관계만 비일비재하다. 아르바이트생을 많이 쓰는 패스트푸드점 영화관 음식점에서는 매출이 떨어지면 임의로 이들을 일찍 퇴근시키거나 근로시간에 미포함된 휴식을 부여하는 ‘꺾기’ 관행이 만연해 있다. 알바노조 실태조사 결과(2014년) 응답자 1,625명 중 64%가 ‘꺾기’ 유경험자였다.
□ 지난달 가사도우미와 고객을 연결하는 앱 운영사인 홈스토리생활의 가사도우미 1,000명 직접 고용 계획이 정부의 규제샌드박스를 통과하자 논란이 커지고 있다. 근로기준법 적용이 일부 면제돼 ‘실제 근로시간’을 기준으로 계약하도록 하면서 우리나라에도 ‘0시간 계약’의 물꼬가 터졌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기ㆍ휴게시간을 근로시간에 포함시킬지 여부, 근기법상 소정근로시간(근로계약상 일하기로 한 근로시간)에 기반한 연장근로수당ㆍ연차 산정도 모호해졌다는 지적이다. 노동자가 점점 더 자신의 시간 처분마저 사용자에 맡겨야 하는, 노동 유연화의 거침없는 질주에 현기증이 난다.
이왕구 논설위원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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