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백 퍼센트 선량한 사람은 없어도 백 퍼센트 사악한 사람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가끔 한다. 동기도 설명도 붙지 않는 자연재해 같은 사악함. 오직 증가하기만 하는 엔트로피처럼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폭력성. 예를 들어 DC코믹스의 영웅 배트맨의 그림자 자아라 할 수 있는 ‘조커’ 같은 사람.
뒤늦게 본 토트 필립스의 영화 속 ‘조커’는 좀 달랐다. 사악함의 근원과 내력이 펼쳐지면서 악당을 이해할 수 있었고, 심지어 잠시 연민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보고 느낀 조커를 표현하자면,
— 그 웃음이 불편하다.
기침보다 전염성이 강한 게 웃음일 것이다. 웃음은 사회적 행동이라서 대체로 여럿이 함께 웃는다. 혼자 웃는 경우는 유일한 승자가 되었을 때나, 약자의 위치로 떨어져 곤란함을 웃음으로 얼버무려야 하거나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표시할 때이다. 조커는 친근감을 공유하며 함께 웃을 사람이 없으므로 거의 혼자 웃지만, 승자인 적은 없다. 그가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순간은 좋아하는 코미디 프로를 볼 때뿐, 대부분 약자로서 부당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나오는 반응이다. 심리적 압박감이나 긴장, 공포를 느낄 때, 그리하여 말로 자신을 설명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는 순간에 웃음이 터지고 그치지 않는다. 말할 힘도 자리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상징인가. 그래서 조커의 웃음에는 전염성이 없다. 현실을 비현실로 만드는 불편함이 있을 뿐.
— 나는 고통스럽다. 당신은 그걸 알아야만 한다.
사악한 범죄자를 미화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영화가 범죄를 조장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문제는 조커의 사악함에 있지 않다. 명백한 사악함은 너무 추해서 사람들을 빨아들이지 않는다. 함께 영화를 보았던 30대 초반의 청년은 조커라는 캐릭터가, “나는 고통스럽다, 당신은 그걸 알아야만 한다”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고통이 원하는 방식에 따라 세상을 재편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인물들은 악인으로 낙인찍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분노는 대중에 전염되고, 걷잡을 수 없는 유혈참극으로 이어진다. 세상이 나의 욕망대로 움직이고, 타인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망상은 매혹적이라 쉽게 감염된다. 고통은 객관적 현실에서도 오지만, 폐쇄된 자아가 바라보는 가상의 세상에서도 온다. 나에게 흥미로웠던 부분은 대한민국의 30대 청년에게 조커의 메시지가 그렇게 읽혔다는 것이다. 영화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지만, 영화도 관객도 그들이 속한 시공간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메시지란 상호작용 아닌가. 지금 이곳에서 포털의 기사마다 줄줄이 달리는 악의에 찬 댓글들은 어쩌면, “나는 고통스럽다, 당신은 그걸 알아야만 한다.”라는 비명이자 협박일지도 모른다. 현실이 변하려면 메시지는 반전되어야 한다. “당신은 고통스럽다, 나는 그걸 알아야만 한다”
— 그러나 춤은 아름답다.
살인과 폭동이 아니라 춤이 먼저였더라면. 안타까웠다. 춤은 주체의 자발성 때문에 아름답다. 물론 몇 년 동안 연습실에서 피땀 흘려 훈련한 각 잡힌 군무라면 좀 다르겠지만. 조커의 춤이 아름다운 것은 오랜 세월 좁고 차가운 공간에 갇혀 있던 진정한 자아가 활짝 피어나는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순서가 바뀌었더라면, 우발적 살인의 충격이 그것을 일깨우기 전에, 순화된 힘이 먼저 와서 문을 자주 두드렸더라면. 춤은 조커가 아니라 ‘호아킨 피닉스’라는 예술가의 것이라는 평을 읽었다. 당연하다. 그러니까 억압이나 학대가 아니라, 말과 감정을 열어주는 놀이처럼 온유한 힘이 먼저 왔어야만 했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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