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자막 번역 알바’ 강우석, 충무로 승부사 거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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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자막 번역 알바’ 강우석, 충무로 승부사 거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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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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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시네마서비스와 1,000만 영화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강우석 감독은 충무로 흥행술사이며 승부사다. 정공법으로 위기를 돌파하며 충무로의 파워맨이 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강우석(59) 감독을 영화의 길로 이끈 작품은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이었다. 영화계에 투신하기로 작심하고 성균관대 영문과를 2학년 때 중퇴한 그는 ‘애마부인’(1982)으로 정인엽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며 충무로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영화만으로 먹고사는 일은 녹록하지 않았다. 현장 일이 비는 틈틈이 강 감독은 전공을 살려 외화 자막을 번역하는 일을 부업으로 삼았는데, 그의 번역으로 극장에 걸린 작품 중에는 밀로스 포먼 감독의 ‘아마데우스’(1984), 존 맥티어넌 감독의 ‘프레데터’(1987), 영문 중역으로 작업한 서극 감독의 ‘소오강호’(1990) 등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들도 있었다.

영화 월간지 스크린의 기자로 일하고 있던 이연호 영화평론가를 만난 자리에서 강 감독은 자신이 번역한 ‘아마데우스’의 시나리오를 봉투째 건네고는 “이토록 대사가 뛰어난 작품은 처음 봤다”며 잡지에 실었으면 한다는 제안을 했다. 이 평론가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시나리오의 번역본은 다음 호 잡지의 별책부록으로 실리게 된다.

영화 '투캅스'(1993)는 강우석 감독 초기 흥행작 중 하나다. 문민정부 등장에 발맞춰 사회비판과 웃음을 적절히 잘 버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장호 감독 영화 보고 충무로 입문 

결혼 상대를 찾지 못한 농촌 총각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뉴스를 접한 강 감독은 이에 착안해 ‘달콤한 신부들’(1988)을 만들며 데뷔한다. 서울 관객 2만1,000명의 저조한 성적에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했지만, 장르영화의 구조 안에서 사회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강 감독의 장기는 29세 때 만든 데뷔작에서부터 일찌감치 싹을 보였다.

성적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끊은 여중생의 유서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는 하이틴 청춘영화의 큰 틀을 잇고, 한편으론 사회고발물의 성격을 띤 작품으로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호평을 이끌어 냈고, 15만5,000명의 흥행 성공과 더불어 제 1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상을 안기게 된다.

실업자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 ‘나는 날마다 일어선다’(1990), 강제규 감독의 각본을 바탕으로 연출한 정치 스릴러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 등의 후속작에서도 이장호 감독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자기화해, 현실을 영화적으로 반영하고자 했던 강우석 영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강 감독은 1992년 칸영화제에서 만난 김형준 현진영화사 기획실장으로부터 ‘아이를 혼자 맡아서 키우는 한 샐러리맨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를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듣고 흥미를 느꼈다. 영화제에서 돌아온 강 감독은 프로듀서인 신철, 유인택과 함께 현진영화사 사무실을 찾아가 시나리오를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출장 중이라 전화로 상황을 전해들은 김 실장은 아직 미완성이라며 난색을 표했지만, 수화기로 쏟아지는 강 감독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넘겨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미스터 맘마’(1992)는 최진실과 최민수를 주연으로 캐스팅해, 서울관객 22만7,000명을 동원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의의는 단발적인 상업적 성공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강 감독과 신철, 유인택 프로듀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남은 수익을 개인당 2억6,000만원씩 나누었는데, 이 돈은 신 프로듀서가 신씨네, 유 프로듀서가 기획시대, 강 감독이 강우석 프로덕션으로 각각 독립해 각자의 길을 가는 데 필요한 종잣돈이 되었다. 이는 머잖아 한국 영화 산업에 찾아올 거대한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상영 때 한창 관객이 잘 드는 데도 극장주가 억지로 영화를 내려 버리는 걸 경험하며 분통을 터뜨렸던 강 감독은 제작과 배급까지, 영화 전반에 걸친 사무를 총지휘할 필요성을 느꼈다. 1993년 강우석 프로덕션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월드 오피스텔에 사무실을 차리며 역사적인 첫 출발을 하게 된다.

회사를 정상궤도로 올린 건 창립작 ‘투캅스’(1993)였다. ‘투캅스’의 제작 과정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원래 제작비 절반을 투자하기로 구두 약속을 했던 임상돈 이화예술필름 사장이 구속되면서 영화는 자칫 엎어질 위기에 처했다. 강 감독은 지방흥행업자들에게 비디오 판권료를 미리 팔아 돈을 끌어오는 임기응변으로 제작비를 충당하며 위기를 넘겼다.

‘미스터 맘마’를 같이한 최민수를 주연으로 발탁했지만 견해 차로 무산되었고, 박중훈도 처음엔 제안을 거절했다가 시나리오를 읽은 뒤에 마음을 돌려 합류했다. 1993년 12월 종로 3가의 피카디리 극장에 걸린 ‘투캅스’의 첫 회 상영은 신통치 않았다. 2,000석의 극장에 500명 남직한 관객만 들었고 극장 근처의 다방에서 흥행 추이를 지켜보던 강 감독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러나 첫날의 분위기와는 달리 영화가 재미있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투캅스’는 해를 넘겨 1994년 4월까지 상영되는 장기 흥행에 돌입했고, 종국엔 서울 관객만 86만명을 모으는 기염을 토했다.

강우석 감독이 영화 '공공의 적2'(2005) 촬영현장에서 환히 웃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실미도'(2003)는 100억원대 제작비로 화제를 모았고, 역대 첫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흥행에 흥행… 오랜 꿈을 이루다 

‘마누라 죽이기’(1995)까지 34만명을 동원하는 성공을 거두면서 강 감독의 앞에 더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때 충무로 실세였던 곽정환 서울극장 회장이 강 감독의 흥행파워에 주목했다. 스크린쿼터 일수를 채우면서도 흥행이 보증된 한국 영화를 필요로 했던 곽 회장은 물주를 자처하며 강우석 프로덕션에 50억원을 투자했고, 강 감독은 같이 일하던 이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좋은 시나리오가 있으면 모두 내게 갖고 와. 돈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게 됐다. 만들고 싶은 영화들, 이제 모두 만들 수 있다.”

평소 그가 원했던 ‘감독들이 시나리오만 들고 들어와도 캐스팅부터 유통까지 끝내는 시스템’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5~6명의 직원으로 출발한 강우석 프로덕션은 영화계의 인재들을 대거 끌어모아 인 하우스 프로덕션(In House Production)으로 면모를 일신하고 간판을 바꿔 달았다.

‘여고괴담’(1998), ‘간첩 리철진’ ‘주유소 습격사건’(1999), ‘플란다스의 개’(2000), ‘반칙왕’ ‘신라의 달밤’ ‘엽기적인 그녀’(2001), ‘가문의 영광’(2002), ‘황산벌’(2003), ‘왕의 남자’(2005) 등 숱한 명작과 히트작을 쏟아내며 2000년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견인할 굴지의 투자배급사 시네마서비스의 탄생이었다. 전세금까지 빼가면서 허덕이며 영화를 찍던 강 감독은 명실공히 충무로의 큰손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시네마서비스의 창립 이후 한동안 강 감독에겐 냉혹한 상업영화 제작자의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영화로 번 돈은 영화에 쓴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이재수의 난’(1999)이나 ‘흑수선’(2001) 때처럼 각본을 들고 오는 동료 영화인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투자해 제작비의 태반을 날리는 손실을 입은 일도 적지 않았다.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1991)에 출연해 인연이 있었던 문성근은 주연으로 출연하는 작품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강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 감독은 혜화동의 이스트필름을 찾아와 제작비 전액(11억원)을 지원하기로 약속했고, 그렇게 좌초의 위기를 넘긴 ‘초록 물고기’(1997)는 작가주의 감독 이창동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에 과감히 제작비 전액을 투자한 결정은 서울 관객만 66만명이 드는 대박 흥행으로 돌아왔다. ‘남자는 괴로워’(1995)와 ‘지독한 사랑’(1996) 등이 연달아 흥행 실패하며 궁지에 몰려 있던 이 감독은 이 작품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이재수의 난’이 흥행 실패해 40억원 가까운 손실을 입고 휘청거리던 시네마서비스 또한 회생시키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대자본을 주무르는 거물이 되었지만 강 감독의 본령은 역시 영화감독이었다.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1998) 이후 사업에 매진하느라 한동안 메가폰을 들지 않았던 그는 강철중이라는 기념비적 캐릭터를 탄생시킨 ‘공공의 적’(2001)으로 전국 관객 303만명이라는 흥행을 기록하며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여전히 건재함을 입증했다.

그의 다음 영화는 원래 메가폰을 잡기로 한 김호선 감독이 손을 떼고 방향타를 잃은 채 표류 중이던 북파공작원들에 대한 실화 영화였다. 영화의 주무대가 되는 세트장 제작에만 10억원을 쏟았고, 출연진은 강원, 부산, 인천, 실미도, 제주 등을 오가며 7개월의 장기 촬영에 돌입했다. 수중침투와 겨울 훈련 장면은 지중해 몰타의 스튜디오와 뉴질랜드 현지 원정 로케이션 촬영으로 추진되었는데 여기에만 각각 7억원과 5억원을 퍼부을 만큼 유례를 찾기 힘든 대작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실미도’(2003)는 1,108만 관객이라는 흥행을 기록하며 한국 영화 1,000만 관객 시대를 열어젖혔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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