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소설(SF)을 문학으로, 과학으로, 때로 사회로 읽고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지식큐레이터(YG와 JYP의 책걸상 팟캐스트 진행자) 강양구씨가 ‘한국일보’에 격주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22> 스티븐 킹의 ‘고도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걸작 ‘변신’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벌레가 된 사내의 이야기다. 여기 영문도 모른 채 큰 변화를 맞닥뜨린 또 다른 사내가 있다. 평범한 중년 남성 스콧 캐리. 195㎝에 100㎏이 넘는 배불뚝이다. 이혼남이지만 수입도 안정적이고, 동네 사람과 사이도 좋은 편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몸무게가 자꾸 줄어드는 것이다.
몸무게가 줄어든다니! 다이어트에 목매는 누군가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하지만 스콧에게 닥친 일은 심상치 않다. 매일 체중계에 오를 때마다 눈에 띄게 몸무게가 줄어든다. 90, 80, 70㎏. 이렇게 몸무게가 줄어드는데도 겉보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스콧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나를 구속하던 중력의 영향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스티븐 킹의 소품 ‘고도에서’는 중력의 영향이 줄어드는 남자의 기묘한 이야기를 전하는 소설이다. 이 대목에서 ‘앗!’ 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 이 소설은 2013년에 세상을 뜬 미국 장르 소설의 거장 리처드 매드슨의 1954년 작품 ‘줄어드는 남자’를 기리는 작품이다. 매드슨의 이름이 생소한 독자라면 영화 ‘나는 전설이다’의 원작 소설의 작가라고 기억하자.
킹은 여러 차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선배 작가로 리처드 매드슨을 꼽았다. 그는 ‘고도에서’의 헌사에서 “리처드 매드슨을 추모하며”라고 밝혔을 뿐만 아니라, 아예 주인공 이름 ‘스콧 캐리’도 그대로 가져왔다. 신장을 포함한 덩치가 줄어드는 원작의 설정은 킹 식으로 비틀었다. (지금 읽어봐도 ‘줄어드는 남자’는 걸작이다.)
킹이 단지 선배 작가에게 존경을 표시하고자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니다. 몸무게, 정확히 말하면 중력의 영향이 점점 줄어드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 주인공 스콧에게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바로 옆집에 이사 온 여성 동성애자(레즈비언) 부부가 마을 사람들과 겉돌면서 적응을 못 하는 것이다. 이웃인데다 개똥을 둘러싼 갈등으로 이 부부와 인연을 맺게 된 스콧은 오지랖 넓은 실천을 시작한다.
그러니 이 소설은 두 겹의 이야기로 독자를 유혹한다. 겉으로는 말 그대로 ‘실존’의 위기에 직면한 사내의 이야기이다(몸무게가 계속 줄어들면 결국 어떻게 될까?). 여기에 더해서 그가 공동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소수자 혐오와 증오에 맞서는 이야기가 얹어지면서 작품은 더욱더 빛난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감동이 밀려온다.
공포 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이 지금 이 시점에 이런 소설을 써낸 이유도 알 것 같다. 70대의 노작가는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트럼프의 미국을 낮은 목소리로 비판한 것이다. 2009년 ‘언더 더 돔’에서 갑자기 돔에 갇혀 버린 작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재난(9ㆍ11 테러) 이후에 공동체를 망가뜨린 조지 W 부시 행정부 치하의 8년을 풍자했던 것과 비슷한 전략이다.
고도에서
스티븐 킹 지음ㆍ진서희 옮김
황금가지 발행ㆍ204쪽ㆍ1만2,000원
가끔 한국에서도 작가가 날 선 목소리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날 것으로 드러낼 때가 있다. 킹의 ‘고도에서’나 ‘언더 더 돔’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작가라면 소셜 미디어에서 선동에 앞장서기보다는 작품으로 말해야 하지 않을까. 제대로 된 작품 한 편 써내지 못하면서 작가랍시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일이야말로 소음 아닐까.
‘고도에서’의 짧은 분량에 실망했다면, 앞에서 언급한 ‘언더 더 돔’을 읽어보자. 생각해 보라. 고양, 전주, 진주, 목포 같은 도시를 투명한 돔이 덮는다. 안에서 나올 수도 없고, 밖에서 들어갈 수도 없다. 엄청난 화력의 폭격으로도 뚫을 수 없다. 영문도 모른 채 돔 안에 갇힌 사람들의 생존기. 2000년대에 킹이 쓴 이 작품을 다시 살펴보니, 마치 트럼프의 미국을 예고한 것도 같아서 섬뜩하다.
SF 초심자 권유 지수 : ★★★★. (별 다섯 개 만점)
강양구 지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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