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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출발선상의 사람들

입력
2019.12.20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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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투명한 미래, 불안한 삶을 말하는 요즘이지만 미래가 불투명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직업이 불안하지 않은 적이 또 있었던가? 잘 짜여진 롤 플레이보다는 불안정한 미래가 좋았다.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를 나 스스로 선택하는 그 순간, 내 세계는 조금씩 깊어졌다. ©게티이미지뱅크
불투명한 미래, 불안한 삶을 말하는 요즘이지만 미래가 불투명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직업이 불안하지 않은 적이 또 있었던가? 잘 짜여진 롤 플레이보다는 불안정한 미래가 좋았다.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를 나 스스로 선택하는 그 순간, 내 세계는 조금씩 깊어졌다. ©게티이미지뱅크

작업실로 학생이 찾아왔다. 풋풋한 얼굴에는 하루하루가 즐거운 듯 자신감에 차있는 표정이 어려 있었다. 중고등학교를 해외에서 보냈다는 그 학생은 미국의 한 건축대학에 입학한 상태였다. 학기 시작하러 출국하기 전까지 건축과 관련된 3D 그래픽을 배우려고 온 것이었다.

자주 연락하는 건축주가 관련된 학원을 알아봐 달라는 요청을 했던 것인데, 작업실로 오라고 선뜻 말했다. 일단 만나 보고 싶었다. 프로그램이야 시간만 들이면 학원에서든 유튜브든 충분히 배울 수 있다. 중요한 건 어떤 목적으로 프로그램을 쓰는가를 아는 것이다. 왜 건축설계를 선택했는지도 궁금했다. 전공 학생을 만날 때마다 늘 하는 말이지만 건축설계는 어설프게 시작하면 버티기가 만만치 않은 분야다.

학생은 건축에 대한 관심과 의지가 무척 깊었다. 30년 전의 나도 나름 열정적인 학생이었는데, 나보다 더욱 확고한 무엇이 있었다. 건축에 대한 순수한 관심!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인가. 이런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나도 순수한 의욕이 솟아오른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나이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새 이야기는 건축설계의 현실로 옮아갔다. 이 세계의 장점과 단점, 나를 힘 빠지게 하는 일, 힘이 솟게 하는 일 등등.

한두 번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프로그램 수업은 그 친구가 개강을 앞두고 떠나기 전까지 대여섯 차례 더 이어졌다. 스케치업, 오토캐드, 라이노, 레빗 같은 프로그램이 어떻게 설계와 연결되는지 원리를 파악하고 실습도 했다. 학교에서 한 학기는 충분히 해야 할 과정을 속성으로 끝낸 셈이다. 수업 후엔 좋아하는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세상에는 정말 훌륭한 건축가가 많다. 건축이 다양한 만큼 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다양한 선택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 중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그 친구의 몫이 될 거다. 미국으로 떠난 후 가끔씩 소식을 전해오는데, 다행히 좋은 선생들을 만나서 더 열정적으로 건축을 공부하는 것 같다. 부디 그 마음과 열정이 지치지 않길 바란다.

얼마 전에는 학과 30주년 홈커밍데이가 있었다. 많고 많은 동기들 중 서른 명이 모였다. 머리가 희끗하거나 머리숱이 훅 줄어 있거나 배가 나왔거나 주름이 진 모습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떠올렸다. 그 시절, 우리가 출발선상에 서있던 시절 말이다. 비록 불안하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어설픈 호연지기로 가득했었다. 미국으로 떠난 그 친구와 잠시나마 같은 선에 서보았다. 출발선, 모든 것이 처음이라 신선했던 그 자리. 그 친구도 먼 훗날엔 누군가에게 그 자리를 물려줄 것이다. 내가 그 선에 있던 시절에 나를 가르친 교수님이 모두 은퇴를 하셨고 나와 친구들이 그 자리를 이어가고 있으니까.

돌아서보니 출발 선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동창의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과연 아이들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갈까, 기대가 된다. 불투명한 미래, 불안한 삶을 말하는 요즘이지만 미래가 불투명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직업이 불안하지 않은 적이 또 있었던가? 잘 짜여진 롤 플레이보다는 불안정한 미래가 좋았다.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를 나 스스로 선택하는 그 순간, 내 세계는 조금씩 깊어졌다.

연말이라 오랜만에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난 자리, 딸아이가 대학에 진학했다는 한 녀석이 슬그머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폭탄선언을 한다. 명퇴할 거라고, 아내와 조용하고 소박하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겠다고. “딸은 잘 키웠으니 자기가 알아서 살겠지. 마누라랑 만난 게 딱 우리 딸 나이 때야. 아름답지?” 딸과 아버지가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한다. 출발선상에 선 모든 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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