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간 딸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딸을 잃은 아버지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다며 엄벌에 처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 아버지가 원한 것은 피고인의 진심 어린 사과였을까. 아니면 피고인에 대한 엄벌이었을까.
현행 형사 사법 체제는 ‘진심’보다 ‘엄벌’에 방점을 찍는다. 쉽게 분간하기 어려운 진심보다 시시비비를 논리적으로 따져 유ㆍ무죄를 정하고, 사회가 합의한 양형 기준에 맞춰 형을 선고하는 형벌을 택한다. 엄정한 법 집행은 비슷한 범죄를 막는 데 효과적으로 알려져 있고, 결정적으로 대다수가 손쉽게 납득한다.
현직 판사인 저자가 쓴 ‘처벌 뒤에 남는 것들’은 진심과 엄벌의 양립 가능성을 모색한다. 재판현장에서 다양한 이들의 삶을 생생하게 목도한 저자는 피고인을 엄벌에 처하는 것,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봤다. 그의 고민은 이것이었다. “피해자의 고통과 회복되지 않은 피해, 깨어진 관계와 파괴된 공동체, 재판과 판결의 뒤에 남겨진 이것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판사는 그냥 형벌을 선고하는 판결만 하면 되는 것인가.”
기나긴 고민 끝에 그가 찾은 해답은 ‘회복적 사법’이다. 회복적 사법은 처벌보다는 사과, 피해 회복, 용서, 화해의 과정을 거쳐 갈등과 범죄를 해결하자는 개념이다. 법원이 단지 양형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피고인이 분쟁을 직접 마주하고 서로 협의, 조정해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회복적 사법의 핵심은 ‘대화’다. 대화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예를 들어 이혼을 요구하며 별거 중인 아내를 찾아가 칼을 휘두른 남성은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는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집단ㆍ흉기등협박)죄를 저질렀다.
현행 양형 기준에 따르면 범죄전력은 없지만 중대한 범죄이고, 집에서부터 칼을 들고 간 점 등으로 미뤄보아 죄질이 좋지 않아 실형이 선고될 확률이 높다. 저자는 이 사건을 다루면서 “피해자인 처는 과연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요”라고 독자에게 되묻는다.
아내에게 어떤 조처들을 해주어야 남편의 폭력적 행위로 인한 상처가 치유되고, 깨진 관계에서 오는 고통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들에게 전문 상담사(조정인)를 붙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엄벌을 요구했던 아내는 남편을 용서해주고 법원에 처벌불원서를 내주었다. 이혼은 못하겠다던 남편은 아내의 원대로 협의이혼을 해주고 손해배상금을 지급했다. 저자는 “대화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고, 사법제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다면 우리의 삶이 그만큼 질적, 양적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처벌 뒤에 남는 것들
임수희 지음
오월의 봄 발행ㆍ280쪽ㆍ1만5,000원
저자가 소개한 놀라우리만큼 원만한 결말은 수많은 판결 중 극히 일부다. 회복적 사법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일지 모른다. 하지만 꿈꾸지 않았기에 이뤄지지 않았을 수 있다.
지난 6일 서울고법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공판에서 정준영 부장판사는 “정치권력자로부터 뇌물을 요구 받을 때 기업이 응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변을 달라”고 했다. 엉뚱한 질문처럼 들리지만 상식적 사회를 회복하려는 작은 시도이기도 하다. 정 부장판사는 저자와 함께 ‘회복적 사법’을 형사재판에 적용하는 시범실시사업을 추진했었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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