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문제로 많은 분들께 걱정과 실망을 끼쳐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삼성이 고개를 숙였다. 지난 17일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을 와해시키기 위해 회사가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이유로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과 강경훈 삼성전자 부사장 등 전현직 임원 다수가 1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은 바로 다음날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입장문을 배포한 것.
재계에선 형이 확정되지 않은 시점에 내놓은 삼성의 ‘공개 사과’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삼성을 향한 사회적 기대에 책임과 본분을 다하겠다는 적극적인 대외 메시지를 통해 경영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려는 전략과 삼성 경영원칙에도 변화가 불가피하단 이재용 부회장의 판단도 녹아 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삼성은 18일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이름으로 작성한 공식 입장문을 통해 노조와해 공작 재발방지를 약속하고 “과거 회사 내에서 노조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식이 국민의 눈높이와 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음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앞으로는 임직원 존중의 정신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이고 건강한 노사문화를 정립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업계에선 짧지만 이날 전해진 메시지가 1969년 창립 이래 50년간 이어져 온 삼성의 ‘무노조 경영원칙’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시사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지난해 삼성 내에 3개의 소규모 노조가 설립되긴 했지만 3개 노조 구성원을 모두 합쳐도 수십 명 수준에 그치고 상급 단체에 가입하거나 공개 활동을 펼치지는 않았다. 그러다 올해 11월에는 전국적 규모의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하 삼성전자 노조가 정식 출범하며 사실상 무노조 경영이 깨졌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은 노조를 반대하거나 노조 없는 회사를 추구하는 ‘반노조’, ‘무노조’와 달리 노조가 필요 없다고 느낄 정도의 업계 최고로 대우하는 환경을 제공하겠다는 취지에서 ‘비노조 정책’이라는 표현을 써 왔다”며 “하지만 이번 입장에 노조에 대한 사내 시각이 잘못됐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걸로 봐서 노사문화에 있어 근본적 변화를 보여주겠다는 뜻 아니겠나”라고 전했다. 노조를 그룹 경영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핵심 축으로 올려 놓겠다는 의중으로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노조 위상에 대해 과거와는 다르게 재설정하겠다는 방침으로 읽힌다.
삼성이 내부적으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자체 감시체계까지 마련 중인 행보도 유사한 맥락이다. 이달 초 열린 이 부회장의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을 맡은 재판부는 “앞으로도 정치 권력자로부터 똑같은 요구를 받을 경우 뇌물을 공여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지며 기업이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감시제도를 요구했고 삼성이 즉각 대응 방안 검토에 착수한 상황이다. 이를 위해 17일에는 삼성 주요 계열사 사장단들이 직접 한자리에 모여 준법경영 강화를 위한 별도 협의체 설립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내외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는 환경 속에서 삼성 내 굵직한 변화들이 보이는 배경에는 이재용식 경영 단초가 짙어져 가는 신호라는 해석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은 과거와 달리 기업의 윤리를 중시하고 정경유착은 단호하게 판단하는 시대적 변화에 직면해 있다”며 “물론 이 부회장을 비롯해 임원들의 재판 등을 감안한 전략적 메시지 표출로 볼 수도 있지만 사회 변화 흐름에 적극적으로 응해 달라진 삼성을 보여주려는 이 부회장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지금 삼성 앞에 놓인 숙제는 기업과 정부의 관계가 시작된 그 시초부터 되짚어봐야 하는 문제”라며 “그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수장인 이 부회장의 어깨가 무거울 것”이라고 말했다.
맹하경 기자 hkm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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