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29> 산시 ① 시안 초당사와 광인사
고도 장안은 지금의 산시성 시안이다. 중원에서 약간 떨어진 변방이다. 서북에 위치한 산시는 풍부한 역사문화를 지녔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실크로드 따라 불교가 들어오거나 중원 문화가 외부로 나가기도 했다. 산시가 배출한 인물로 ‘사기’를 쓴 사마천이 있으며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의 고향도 이곳이다. 유명 관광지인 병마용과 화청지는 제쳐두고, 사마천과 이자성을 비롯해 잘 알려지지 않은 시안 이야기를 4편으로 나눠 소개한다.
시안 시내 서쪽 다칭루(大庆路) 579호에 실크로드 출발지임을 상징하는 조각 군상이 있다. 실크로드 개척 2,100주년을 기념해 1987년에 설치했다. 기원전 한 무제가 서역 왕국과 교류하기 위해 장건을 외교사절로 보낸다. 낙타 타고 실크로드를 왕래한 인물, 서역인을 연상하는 조각상이다. 소박한 평민 위주로 설계했기 때문일까? 아무리 찾아도 장건을 닮은 인물은 없다. 장건은 실크로드 곳곳에 등장한다. 만리장성 서쪽 끝자락 자위관 현벽장성에 실크로드를 왕래한 역사 인물 조각상이 있다. 선두에 외교사절 징표를 든 장건이 있다. 훨씬 강렬한 이미지는 둔황 양관에 있다. 서역으로 가는 사막 입구여서인지 자태가 아주 실감난다.
‘실크로드’는 독일 지리학자 리흐트호펜(1833~1905)이 1877년에 쓴 ‘차이나(China)’에서 처음 언급했다. 이후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기나긴 길에 대한 대명사가 됐다. 꼭 ‘비단’이 독점한 길은 아니다. 중국인 장건이 갔던 길은 훨씬 전부터 있었다. 중국 중심의 시각에서 살짝 벗어나면 ‘유라시아로드’라 불러야 세계 표준에 더 가깝다.
어쨌든 실크로드를 거쳐 동서양 문물이 전해졌고 낙타는 상업을 주도했다. 군마는 피를 뿌리는 전쟁을 수행했다. 종교가 오고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실크로드가 동아시아에 기여한 최고 선물은 어쩌면 불경일지 모른다. 현벽장성 아래 새긴 실크로드 조각상에 장건을 비롯해 곽거병ㆍ반초ㆍ현장ㆍ마르코폴로ㆍ임칙서ㆍ좌종당이 나란히 있다. 사기성이 농후한 마르코폴로를 빼면 대부분 살인적 전쟁을 수행했다. 수많은 인물이 왕래했지만, 쿠마라지바(Kumārajīvaㆍ344~413)야말로 가장 위대한 ‘공간 이동자’이라 말할 수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 오아시스의 구자왕국(龟兹王国)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중원의 고도 장안에 이르렀다. 그리고 초당사에서 평생 불경을 번역했다.
시안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초당사(草堂寺)로 간다. 양쪽에 종루와 고루가 있다. 사대천왕이 도열해 있고 천왕전과 대웅보전에 미륵불과 석가모니가 봉공된다. 대비전ㆍ와불전ㆍ법당ㆍ장경루는 다른 사찰과 비슷한데, 커다란 암석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친 부처탄생도가 그려져 있다. ‘쿠마라지바삼장기념당(鸠摩罗什三藏纪念堂)’에 발길이 딱 멈춘다. 일본 불교 종파인 니치렌종(日莲宗)이 1,600만엔을 투자해 건축했다. 초당사는 대승불교 조정(祖庭) 중 하나다. 중국ㆍ한국ㆍ일본에 영향을 끼쳤으니 일본에서 쿠마라지바를 존중하는 일은 당연하다.
‘삼장법사’라 하면 가장 먼저 손오공이 생각나고 현장법사가 떠오른다. 당 태종이 현장에게 삼장이란 법명을 하사했다는 소설 서유기의 일화는 머릿속에서 지우자. 석가모니 살아생전 단 하나도 기록하지 않은 죄를 저지른 제자들은 그가 열반에 든 후에야 법회를 연다. 기억력이 뛰어난 제자가 스승이 설법한 모든 말을 뱉어내면 지름 3m의 넓은 나뭇잎에 받아적었다. 기본 설법은 경장(經藏), 실천 규범은 율장(律藏), 철학 체계는 논장(論藏)으로 분류해 광주리 세 개에 각각 담았다. 세 분야 모두 통달하면 삼장을 이룬 법사라 호칭한다. 중국 최초로 삼장법사의 영광을 얻는 이는 당연히 쿠마라지바다.
고대 구자왕국은 지금의 신장위구르자치구 쿠처(库车)로 쿠마라지바의 출생지다. 인도 상인과 구자 공주가 결혼해 천재 쿠마라지바라가 탄생했다. 6개월 만에 말을 하고 세 살에 글자를 알았으며 다섯 살이 되자 수많은 책을 읽었다. 일곱 살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해 천축을 유람했다. 산스크리트 언어에 능통했고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를 모두 통달하고 삼장에 정통했다. 구자왕국으로 귀국하자 세상이 알아주는 유명 법사가 됐다. 구름처럼 모여든 군중 앞에서 부처처럼 감동 주는 설법을 하고도 남았다. 쿠처에 ‘제2의 둔황’이라 불리는 키질 천불동이 있다. 2012년 가을에 갔을 때 고고하고 엄숙한 쿠마라지바 조각상 앞에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이때 중원은 십육국시대였다. 후량(后凉)을 건국한 여광은 타클라마칸 사막까지 진출했다. 384년에 쿠마라지바를 강제로 양주(凉州, 지금의 우웨이)로 압송했다. 17년을 머물며 한자를 익힌 쿠마라지바는 일생일대의 은인을 만난다. 후진(后秦)의 두 번째 황제인 요흥은 불교를 숭상했고 쿠마라지바를 존경했다. 401년 후진의 도읍인 장안으로 영접된 쿠마라지바는 초당사에서 불경 번역에 매진했다. 언어 천재 쿠마라지바는 산스크리트 불경을 한자로 번역하는 사명을 띠고 ‘부처님이 보우하사’ 세상에 태어났음이 틀림없다.
쿠마라지바는 요흥이 추구한 불교국가를 위해 경ㆍ율ㆍ논 모두 94부 425권을 번역했다. 불경을 손이 아닌 입으로 번역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전설이자 기적 같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Saddharma pundarika sutra)’를 펼쳐 책장을 넘기며 중국어로 ‘법화경(法華經)’을 구술했다. ‘바즈라체디카 프라즈냐파라미타 수트라(Vajracchedikā prājñāpāramitā sutra)’는 ‘금강경(金剛經)’으로 번역했다. 제목만 아니라 전 문장을 마치 동시통역처럼 구술했다. 제자들은 받아쓰기에 정신이 없었다.
바로 옆에 쿠마라지바 사리탑이 있다. 유리로 막아 좁은 틈으로 들여다 볼 수 밖에 없다. 413년 4월 13일 70세로 열반했다. 명언을 남겼다. “내가 번역한 모든 경전에 단 하나라도 착오가 없다면 화장 후에도 내 혀는 타지도 문드러지지도 않으리라”라고. 사리탑을 만들자 연꽃 한줄기가 피어났다. 요흥은 그가 남긴 혈근(舌根)이라 칭송했다. 초당사를 나오는데 승복 입은 스님 둘이 걸어간다. 혈근이 사실인지, 혹시 사리탑 안에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영어의 숙어처럼 중국어에도 무조건 외워야 하는 시관융위(習慣用語)가 있다. ‘싼춘부란즈서(三寸不烂之舌)’는 ‘말솜씨가 능란하다’라는 말이다. 입 하나로 일생을 풍미하던 인물이 중구난방으로 넘쳐나던 춘추전국시대, 사마천의 ‘사기’에도 혀에 대한 인용이 많다. 사마천 사후 쿠마라지바에 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세 치 혀’가 등장한다. 실크로드를 건너온 쿠마라지바의 혀는 오늘날 동양문화를 꽃피운 일등 공신이다.
초당사만큼 역사적 가치가 풍성한 사원이 있다. 시안 성벽 서북쪽에 있는 티베트불교 게룩빠(dge lugs pa) 사원인 광인사(广仁寺)다. 산시에서 유일하게 티베트불교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중원에 단 하나뿐인 ‘녹도모(绿度母)’ 도량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도모를 타라(Tara)라고 부른다. 관음보살의 화신이다. 고통받는 중생을 바라보며 관음보살이 흘린 눈물은 수많은 타라 보살로 출현한다. 중생이 고통과 고난을 구제하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티베트에서는 녹도모를 당나라 문성공주라고 감정이입하며 경배한다. 이유는 지극히 종교적이면서도 역사적이다.
티베트 통일군주 쏭짼감뽀는 문성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황금 60kg으로 만든 도모불상을 보냈다. 문성공주는 티베트로 시집 갈 때 답례로 개원사에 있던 당나라 국보 석가모니 12세 등신불을 가지고 갔다. 실크로드를 따라 가다가 좌회전한 후 당번고도(唐蕃古道ㆍ당나라와 티베트를 연결하는 길)를 거쳐 라싸로 향했다. 조캉사원에서 지금도 신도와 만나고 있다. 어느 날 당 태종이 석가모니 불상이 있던 자리에 연화좌만 덩그러니 남은 모습을 보게 됐다. 마음속으로 고심하던 당 태종에게 티베트에서 온 황금 도모불상이 속삭였다. ‘황상, 다른 보살 필요 없습니다. 제가 석가모니 부처를 대신해 중생을 헤아리겠나이다.’
광인사 앞에는 티베트에서 흔히 보는 오색 타르초가 휘날리고 백탑 초르텐이 있다. 몽인어호도(蒙人驭虎图)가 조벽을 채우고 있다. 몽골 용사, 호랑이, 쇠사슬이 주제다. 정교 합일 체제에서 달라이라마에게는 몽골족이 두려운 존재이자 든든한 뒷배경이었다. 그만큼 위상이 컸다. 호랑이는 체제를 거부하는 적을 뜻한다. 호랑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몽골족 알탄 칸에게 달라이라마 칭호를 하사받았다. 덕분에 정권을 유지했다. 티베트 지역에 흔하게 등장하는 그림이다. 약간 다른 해석도 있다. 각각 관음보살ㆍ문수보살ㆍ금강수보살을 상징한다. 종교로 치환하고 있다. 그럴싸한 포장이다.
1703년 청나라 강희제가 시안에 왔다. 변경 지역을 공고히 하고 치세를 돈독하게 할 목적이었다. 성곽 안을 두루 살핀 강희제는 광인사 건립을 명령했다. 광인사는 티베트 지도자가 수도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머무는 행궁이었다. 이때 개원사에 있던 도모보살이 광인사로 이전됐다. 강희제는 사원 이름도 짓고 편액과 비석도 하사했다. 대웅보전 대신에 녹도모전이 있다. 강희제가 하사한 자운서음(慈云西荫)은 ‘자비로운 구름으로 서쪽을 그늘지게 한다’는 뜻인가?
청나라가 자비를 베풀어 서역을 평화롭게 한다는 뜻일텐데 자꾸 ‘자비가 폭우가 되어 너희를 몰살할 수 있다’는 협박으로 보인다. 자율은 보장하지만 체제에 반항하지 말라는 경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질 이유가 없다. 녹도모 양옆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대웅보전에서 석가모니를 대접하는 모양새와 같다. 보면 볼수록 녹도모는 풍부한 사랑을 담았다. 고개를 갸우뚱한 모습은 중생이 감내하는 고난을 염려하는 인상이다. 늘 어루만져주는 어머니 마음이 연상된다.
녹도모전 동쪽에 티베트불교 재신전이 있다. 다섯 재신 중 수괴인 황재신(黄财神)이 있다. 중국에서 유일한 금도금 재물신이다. 서쪽에는 관우를 봉공하는 관공전(关公殿)이 있다. 한족 전통신앙의 주인공 관우도 재물신이다. 티베트 사원에 자리를 차지한 이유로 두 민족 문화가 융합한 증거라는 싱거운 주장이 적혀 있다. 민간에서 재물을 기원하는 관제묘와 도교 사원에서 재물신으로 활약한 관우가 티베트 사원에서도 당당하다. 청나라 때 건축된 광인사가 지닌 운명이다.
천불전은 티베트불교 종교개혁가로 게룩빠를 창시한 쫑카빠 대사를 봉공한다. 양옆으로 수제자인 갤찹제와 케둡제가 보좌하고 있다. 벽에는 불감 속에 자그마한 부처가 셀 수 없이 많다. 용이 휘감은 기둥 위에 날씬한 보살이 새겨져 있고, 티베트불교 팔보(八宝)가 진상품으로 나란하다. 쫑카빠 제자 중 케둡제는 판첸라마 1세가 되고 가장 나이 어린 제자 겐뒨둡빠는 달라이라마 1세가 된다. 서열 1위 달라이라마, 2위 판첸라마다. 몽골족 알탄 칸에게 ‘위대한 스승’이란 의미로 달라이라마 칭호를 받은 쐬남갸쵸는 스스로 3세가 되고 스승을 추증했다. 현재 달라이라마 14세가 생존해 있다.
가장 안쪽에 장경각이 있다.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가 황제를 친견하러 갈 때 머물던 행궁이다. 장경각 동쪽에 판첸라마, 서쪽에 달라이라마가 머물렀다. 전각 안 중앙에 석가모니 12세 등신불이 있다. 세계에 딱 두 개 있다. 하나는 문성공주가 라싸로 가져갔다고 이미 언급했다. 두 등신불은 모양이 똑같다. 라싸 조캉사원 등신불은 사진 촬영도 어렵지만, 사람이 많아 코 하나도 제대로 보기 힘들다. 붉은 비단으로 몸을 감싼 문성공주가 단정하게 앉아 있다. 문성공주와 12세 등신불이 8세기 당시 당나라와 티베트 사이에 긴밀하고 평화롭던 역사를 설명해주고 있다.
장경각 지붕 위의 사슴 두 마리가 자꾸 떠오른다. 석가모니가 녹야원에서 처음 설법할 때 자리를 지킨 사슴 한 쌍이다. 중원으로 온 쿠마라지바, 티베트로 간 문성공주. 실크로드와 당번고도에 아무리 찾아도 그들이 남긴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세 치 혀로 남았고 녹도모가 됐다. 세상을 이어준 그들은 빛나는 사슴이었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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