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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50주년] 남을 위해 내어주는, 전태일의 유쾌함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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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50주년] 남을 위해 내어주는, 전태일의 유쾌함을 기억하자

입력
2019.12.19 04:40
수정
2019.12.19 15:41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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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주란 X 미싱사 박경미 동반 인터뷰

[저작권 한국일보]1980년대 당시 봉제공장은 햇볕이 차단된 1.5m의 다락으로 개조돼 일어서기는커녕 허리조차 제대로 펴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30년이 지나 당시의 공장 모습을 재현한 전태일기념관의 전시실에서 노동자 박경미(왼쪽)와 소설가 이주란이 마주 앉았다. 한설이PD
[저작권 한국일보]1980년대 당시 봉제공장은 햇볕이 차단된 1.5m의 다락으로 개조돼 일어서기는커녕 허리조차 제대로 펴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30년이 지나 당시의 공장 모습을 재현한 전태일기념관의 전시실에서 노동자 박경미(왼쪽)와 소설가 이주란이 마주 앉았다. 한설이PD

1970~80년대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 누군가는 지도자 덕이라고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회장님 덕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산업역군들 덕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걸 가능케 했던 이는 ‘여공(女工)’이었다. 밖으로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버텨내면서 안으로 살림을 살아낸 이들이 아니었다면 한국 고도성장의 신화란 불가능했다.

1970년 11월 13일 동대문 평화시장 재단사였던 전태일이 제 한 몸을 불사르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친 것도, 따지고 보면 봉제공장의 여공들을 위해서였다. 여공들이 제 손을 바늘로 찔러가며 졸음을 쫓아내면서 하루 14시간씩 일하고 손에 쥐었던 일당은 겨우 50원. 당시 커피 한 잔 값에 불과했다. 보조에 불과하다는, ‘시다’라는 멸칭까지 감수해야 했다. 전태일은 그런 현실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2020년 ‘전태일 50주년’을 맞아 여공들을 한국 현대사의 주인공으로 다시 불러내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서울 관수동 전태일기념관에서 20일부터 시작하는 ‘시다의 꿈’ 전시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가 이주란이 ‘현역 여공’ 박경미를 만나 소설 ‘어른’을 내놨다.

[저작권 한국일보]박경미는 열일곱에 상경해 서울 장충동 봉제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인근에 있던 형제교회에 야학을 다녔고, 근로기준법을 배웠다. 당시 야학 모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한설이PD
[저작권 한국일보]박경미는 열일곱에 상경해 서울 장충동 봉제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인근에 있던 형제교회에 야학을 다녔고, 근로기준법을 배웠다. 당시 야학 모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한설이PD

강원 정선에서 나고 자란 박경미는 열여덟 되던 1985년쯤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옆 봉제공장 여공이 됐다. 야학에서 근로기준법을 배웠고, 전태일의 뜻을 이은 청계피복노조에서 활동했다. 지금도 신당동에서 일한다.

그래서 소설은 한 시절 고생 진탕한 얘기만 가득할 것 같지만, 의외로 유쾌하고 발랄하다. 이주란 작가는 박경미를 통해 본 전태일에게서 배울 것은 ‘유쾌함’이라 봤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유쾌함이다.

‘이주란-박경미’ 외에도 ‘조해진-김경선’ ‘정세랑-장경화’ ‘최정화-홍경애’ 등 ‘작가-여공’ 세 커플도 함께 소설을 썼다. 전태일기념관은 소설뿐 아니라 소설쓰기 과정까지 모두 전시한다. 지난 19일 이주란 작가와 박경미 여공을 전태일기념관에서 만났다.

[저작권 한국일보]이주란 소설가는 처음엔 박경미와의 소설 작업을 많이 망설였다. 그들의 삶을 제대로 그려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태일이 가졌던 유쾌함과 사랑을 박경미에게서 봤고, 오늘날의 다정한 박경미의 모습을 그려내는 소설을 썼다. 한설이PD
[저작권 한국일보]이주란 소설가는 처음엔 박경미와의 소설 작업을 많이 망설였다. 그들의 삶을 제대로 그려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태일이 가졌던 유쾌함과 사랑을 박경미에게서 봤고, 오늘날의 다정한 박경미의 모습을 그려내는 소설을 썼다. 한설이PD

-35년간 미싱을 돌리고 있는 박경미는 어떤 사람인가.

박경미(이하 박)= “열일곱 겨울쯤 서울 가는 고향 친구 따라 나섰지요. 처음에는 장충체육관 근처에서 일했어요. 근처에 ‘형제교회’가 있었는데, 심심해서 가봤다가 야학을 시작했어요. ‘시정의 배움터’라는 곳이었는데, 공부보다 중요한 진짜 공부를 가르쳐준대요. 그게 ‘근로기준법’이었어요. 그렇게 노조를 알게 되고 청계노조에 가입했어요. 35년간 일했어요. 임신, 출산 말고는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이주란 작가는 소설 작업을 굉장히 망설였다 들었다.

이주란(이하 이)= “이런 작업이 처음이라 ‘내가 감히’라는 마음이 앞섰어요.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야기였거든요.”

-그러다 박경미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던데.

이= “제가 가장 말하고 싶었던 건 ‘전태일의 유쾌함’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이었어요. 소설 쓸 때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박경미 선생님에게 그런 게 있었어요. 직접 뵙기 전에 본 박 선생님 인터뷰 영상, 사진을 통해 그런 모습을 봤고, 실제로 만나보니 더 그랬어요. 그렇게 짝이 됐죠. “

[저작권 한국일보]미싱 바늘에 찔린 손가락은 겨울마다 시렸다. 지금 보자면 명백한 산재지만, 그땐 잘 구부려지지도 않는 손가락을 펴 가며 다시 일터에 나갔다. 한설이PD
[저작권 한국일보]미싱 바늘에 찔린 손가락은 겨울마다 시렸다. 지금 보자면 명백한 산재지만, 그땐 잘 구부려지지도 않는 손가락을 펴 가며 다시 일터에 나갔다. 한설이PD

-소설엔 옛 이야기가 거의 없다.

이= “박 선생님의 과거 모두를 소설에 못 담을 것 같았어요. 지금 현재 박경미의 삶에 대해, 또 그걸 바라보는 현재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마을의 어른’ ‘나이 차가 있는 우정’을 그려내게 됐어요.”

-소설을 쓰면서 자주 떠올렸던 장면이 있었나.

이= “박 선생님의 유쾌함과 사랑, 정, 이런 것들. 자기를 위한 게 아닌, 그런 유쾌함들이요.”

-봉제공장은 얼마나 열악했나.

박= “일을 시작하는 시간은 있는데 끝나는 시간이 없었죠. 실밥 떼고 다림질하고 포장까지, 전 과정을 다 했는데, 아침 8시반 시작하면 새벽 1시가 돼야 끝났어요. 기숙사가 있었는데 지금은 1명 자기도 힘든 방에 5,6명씩 살았어요. 바닥에 불이 안 들어와 전기장판을 끼고 살았죠. 그러고 월급 7만원을 받았어요. 밥값 1만5,000원을 빼면 5만5,000원이 남았죠. 그 땐 그게 문제라고 생각 못했어요. 다 그렇게 일했고, 그 일 말고는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청계노조 노동자들은 노조 해산 뒤에도 회원이나 주위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경우 집단으로 몰려가 항의해 임금을 받아내기도 하고, 사용자로부터 폭행 폭언을 당할 경우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사진은 1980년 4월 평화시장 앞에서 노조원들이 근로조건개선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청계노조 노동자들은 노조 해산 뒤에도 회원이나 주위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경우 집단으로 몰려가 항의해 임금을 받아내기도 하고, 사용자로부터 폭행 폭언을 당할 경우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사진은 1980년 4월 평화시장 앞에서 노조원들이 근로조건개선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다치기도 많이 했나.

박= “손가락에 미싱 바늘이 꽂히면 뼈가 있어서 바늘이 휘어요. 그럼 손으로 할 수 없으니 펜치를 가져와 뽑아요. 지금 같으면 병원 가고 난리를 쳤겠지만 그땐 그런 것도 없었어요. 미싱 기름에 담그면 피가 멈추고. 그러면 다시 일을 했어요. 다들 그러는 줄로만 알았죠. 기계가 자동화되면서 나도 손을 크게 다친 적이 있어요. 기계를 멈추질 못하고 손을 찍었는데, 한두 달 정도 일을 못했어요. 그땐 치료나 보상을 해주기는커녕, 네가 실수해서 다친 거란 이유로 월급도 안 줬어요. 심할 경우 해고도 했죠. 저도 병원에서 손이 안 구부러질 거라고 했는데, 매일 손을 주무르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일하는 시간도 길고, 해야 할 일도 많았으니 그런 사고들이 났죠.”

-일하는 사람 대부분이 여자라 성희롱도 많았다 들었다.

박= “말도 못하게 많죠. 하루 24시간 중 거의 대부분을 공장에서 보냈으니까요. 사장이나 그런 사람들하고 너무 오래 같이 있었죠. 다들 열네 살, 열다섯 살, 일하면서 공부해보겠다며 온 친구들이었으니까 속앓이들만 했죠. 억울하고 분하기도 했지만, 그땐 그런 걸 잘 몰랐죠.”

젊은 시절 박경미. 30년 전 야유회에서 찍은 사진. 박경미씨 제공
젊은 시절 박경미. 30년 전 야유회에서 찍은 사진. 박경미씨 제공

-부당하다는 생각에 청계피복노조에 가입했나.

박= “투쟁은 타의가 컸죠(웃음). 노조에 가입되어 있다고 하면 사장들이 함부로 하진 못했으니까요. 눈치도 좀 보고.”

이= “노조라는 게 너무 당연하고 익숙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실제로 보면 정말 낯선 거예요. 지금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게 있어도 참게 되는 거 같아요. 방법도 모르고 하니까. 그런데 박 선생님은 그걸 하신 거죠.”

박= “청계노조는 전태일이 이뤄놓은 거잖아요. 작업 환경과 임금을 고쳐 준 곳이죠. 지금도 노력하는 곳이고요. 시위라는 게 처음엔 못하다가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가 질러지더라고요. 그런데 요즘은 참 좋지 않나요. 예전에 누가 신고할까 숨어 다니면서 시위했는데, 지금은 ‘광화문에서 4차선을 다 막아도 안 잡아가는구나’ 싶어 감회가 새롭다고 할까요.(웃음)”

-한때 시다라 불렸던 이들을, 지금 사람들은 어떻게 봐야 할까.

박= “누군가의 노동력을 한번쯤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내 돈 주고 내가 산 것이라 해도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 물건이 탄생했겠구나, 라는. 아직도 ‘공장 다니는 사람’을 무시하는 몰상식한 사람들이 있어요.”

-소설 제목이 ‘어른’이 된 이유는 뭔가.

이= “다른 제목을 생각했는데, 쓰다가 마지막에 제목을 바꿨어요. 시대가 그랬고, 박 선생님도 그렇게 살았고, 지금 와서 누가 그걸 보상해줄 수 있다거나 그런 건 없잖아요. 자기 삶을 계속 살아나가는 데 가장 힘이 되어주는 이들은 친구나 주변 이웃, 동료인 것 같아요. 박 선생님 같은 분을 좋은 친구나 좋은 어른으로 생각하자,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을 늦었다 해도 지지해드리자, 그게 중요하다 생각했어요. 실제 박 선생님이 정말 좋은 어른이시기도 하고요.”

박= “좋게 봐줘서 좋긴 한데 창피한 얘기고요. 젊을 땐 배려를 못하고 이기적이었던 것 같아요. 나이 들면서 나도 좋은 언니, 좋은 이웃으로 변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언니라는 말이 참 좋다

박= “그게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해요. 노조에 있던 언니 오빠들, 그렇게 남을 위해 살던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것들이 더 크죠.”

-노조라는 게 결국 언니 오빠들의 공동체였나.

박= “그땐 다들 악에 받쳐서 단결이 훨씬 더 잘됐어요. 혼자서 못해도 모이면 힘이 나잖아요.”

이= “인터뷰할 때 ‘대단하시다’ 했더니 ‘지금은 못 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전 그게 더 대단했어요. 지금이 아니라 그때 해내신 거잖아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사시는 거잖아요. 소설을 쓰고 나니까 제가 더 좋은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다른 분들도 그런 영향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박= “공장이 존재하고 굴러가는 동안에는 누군가는 더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일하겠죠. 되겠죠. 언젠가는.”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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