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 뺀 클래식 공부… 술 마시며 백일장… 혐오 없는 젠더 논쟁…
학연·지연·혈연 의미 없는 세상서 사회적 인간으로 재미·자아실현
관계 피로감 없는 소통·연대… 19세기 ‘살롱’ M세대 공론장 재탄생
평일 저녁 일사불란한 ‘퇴근길 행렬’을 벗어나 도착한 이 곳엔 여유로운 템포의 클래식이 은은하게 흐른다. 다정하게 마주 앉은 대여섯 명의 청춘남녀는 스스럼없이 안부를 묻는 사이지만 서로의 직업이나 나이는 모른다. 한 달에 두 번 남짓 이 작은 공간에 모여 때로는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때로는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음미하며 함께 찻잔을 기울일 뿐이다.
이 곳은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문토(munto) 라운지’다. 격주 목요일마다 문토에 모이는 이들은 클래식 모임 ‘아는 만큼 들리는’의 회원들이다. 오직 클래식이란 공통의 관심사만 공유한다. 이들은 ‘취향’으로 하나되는 자신들의 모임을 신개념 공동체 ‘살롱(Salon)’이라 부른다.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살롱 문화가 2019년 한국에서 부활하고 있다. 프랑스어로 ‘방(Room)’을 뜻하는 살롱은 18~19세기 유럽의 지성인들이 신분 성별 나이의 벽을 허물고 자유롭게 대화하던 사교 공간을 일컬었다. 최근 청년세대 사이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른 ‘취향 기반 커뮤니티’도 출신이나 소속보다 각자의 관심사나 가치관을 더 중요시한다는 점이 19세기 유럽의 ‘살롱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혈연 학연 지연 등이 중심인 ‘인맥 사회’에 환멸을 느끼는 동시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기반으로 한 피상적인 인간관계에 지친 2030들의 호응이 특히 뜨겁다.
‘21세기형 살롱’을 표방하는 커뮤니티 서비스는 급속히 규모를 불리는 추세다. 2015년 9월 회원 80여명에 4개 모임으로 시작한 독서모임 서비스 ‘트레바리’는 2년 만에 회원 수 1,000명을 돌파했다. 현재는 3,500여명의 회원과 다채로운 모임 200여개를 거느린 스타트업의 성공 모델이 됐다.
‘소셜살롱’을 지향하며 지난해 두 가지 모임으로 조촐하게 문을 연 문토 또한 2년 만에 모임이 50여개로 늘어났다. 공간을 거점으로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을 연결하는 ‘취향관’과 ‘문래관’ 같은 살롱들도 서울 시내 곳곳에 생겼다.
명실상부 ‘요즘 대세’로 자리매김한 살롱은 단순히 취향을 공유하는 차원을 넘어 여러 모습으로 변주되고 있다. 모르는 이들과 이런저런 취미 활동을 직접 해보는 ‘체험현장’이 되거나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이들끼리 사회 이슈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토론장’이 된다. 하다못해 시시콜콜한 고민들을 늘어놓는 ‘고해성사의 장’ 역할도 한다.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색 살롱 3곳을 직접 찾아 그곳에 모인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고상한 척 하네” 손가락질 벗어나 마음껏 누리는 ‘취향살롱’
문토는 요리 영화·음악·글쓰기·재테크 등 여러 관심사를 바탕으로 사람과 사람을 잇는 취향 기반 소셜살롱이다. 함께 새로운 요리법을 개발하며 음식에 관한 저마다의 철학을 나누거나, 혼자서는 쉽게 즐기기 힘든 재즈와 클래식 등 장르 음악의 감상법을 배워 나간다. “클래식은 특히 어렵다는 인식이 강한데 사람들이 많이 오냐”고 묻자 “바로 그 ‘어렵다’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이 몰린다”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지난 4월 첫선을 보인 이후 열렬한 반응을 얻고 있는 클래식 모임 ‘아는 만큼 들리는’은 내달 다섯 번째 기수를 모집한다.
전민지 문토 마케터는 “이곳에선 전문가와 쌍방향으로 소통하며 깊이 있는 지식을 보다 쉽게 알아 갈 수 있기 때문에 생소한 분야에 도전해 보려는 회원들이 특히 많다”고 설명했다. 재테크같이 진입장벽이 높은 주제에도 매 시즌 적지 않은 수의 신입회원들이 유입되는 이유다.
‘아는 만큼 들리는’의 리더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수민씨는 “보통 ‘클래식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허세 부리느냐’는 등 교양을 과시하려 든다는 오해를 받는다”면서 “이곳은 그런 편견 어린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스스로의 취향을 키워 나갈 수 있는 안전지대와 같다”고 말했다.
‘아는 만큼 들리는’의 멤버인 직장인 A씨는 “전에도 클래식을 선호하는 편이긴 했지만 마음먹고 파고들거나 공부를 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감상하는 쪽은 아니었다”며 “클래식 살롱에 참여한 이후엔 감상의 지평이나 해석의 폭이 이전과 다르게 넓어져 클래식을 보다 다채롭게 즐길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문토에서는 멤버들끼리 서로의 나이나 직업을 묻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서로의 신상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속속들이 아는 것보다 취향을 알아 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멤버 B씨는 “올 때마다 궁금한 것, 알고싶어 지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진다”며 “일상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기인 것 같다”고 말했다.
때때로 살롱 밖으로 나가 공연 등을 함께 관람하기도 한다. ‘아는 만큼 들리는’ 의 멤버들 역시 지난 11일 예술의 전당을 찾아 경기필하모닉이 연주하는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을 감상했다. 클래식을 좋아해도 라이브 공연 관람은 영 익숙지 않았던 멤버들의 반응이 특히 폭발적이었다. 멤버 이지은(24)씨는 “전에 없이 활발하게 공연을 보러 다니다 보니 잘 모르는 작곡가들도 직접 경험하며 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며 “지금은 ‘한번 들어보지 뭐, 가 보지 뭐!’란 생각이 앞서 클래식에 대한 장벽이 저절로 낮아졌다”고 말했다.
◇취미로 시조 뽑던 옛 문인들처럼…술잔 기울이며 글 쓰는 ‘문학살롱’
서울 마포구 합정동 골목의 ‘문학살롱 초고’에 들어서면 열댓 평 남짓한 좁은 공간을 빼곡히 채운 책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손님을 반긴다. 낮에는 커피를, 밤에는 술을, 때로는 주인장의 취향 따라 고른 책들을 안주 삼아 팔기도 하는 흔한 북카페처럼 보이지만 이 곳엔 다른 특별한 게 있다. 예고나 공지도 없이 불시에 열리는 ‘즉석 백일장’이다. 단골 손님과 직원들이 함께 술을 마시다 재미로 끼적대던 게 이제는 정체성으로 굳어졌다.
주말이었던 지난 7일 오후 9시쯤 이곳을 찾은 기자와 단골손님 3명, 살롱 직원 1명까지 총 5명이 이날 즉석 백일장의 참가자가 됐다. 글감은 보통 짚이는 대로 펼친 책에서 무작위로 뽑는다. 살롱 직원이 눈을 감고 책장을 더듬기 시작하자 참가자 중 한 명이 대뜸 “멈춤”이라고 외쳤다. 직원의 손길이 멎은 곳에서 골라낸 책의 제목은 ‘섬’. 다른 참가자가 “아무 페이지나 펼쳐 열일곱 번째 문장을 읽어 주세요”라고 청하자 직원은 ‘나는 예기치 못한 충만감을 맛보았다’는 문장을 천천히 읽어 내렸다. 이 문장 속 ‘예기치 못한 충만감’이 이날 백일장의 주제어였다.
백일장 참가자 5명이 1시간 동안 머리를 쥐어짠 끝에 내놓은 글들은 각양각색, 천차만별이었다. 누군가는 같은 반 첫사랑이 건넨 인사에 마음이 부풀었던 경험을 시로 풀었고, 다른 이는 처를 잃고 자식을 혼자 기르던 홀아버지가 어느 날 훌쩍 자란 아들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는 이야기를 짧은 소설에 담아냈다.
백일장에 참가한 김연지씨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같은 주제로 글을 쓰다 보면 언제나 예측 불가의 재미를 느낀다”며 “여러 사람들의 즉석 글을 접하면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탐구해 나가고 있는 듯한 기분까지 든다”고 말했다. 글쓰기는 1시간 만에 끝났어도 서로의 글을 함께 읽고 감상을 나누느라 참가자들의 대화는 자정 무렵까지 이어졌다.
문학살롱 참가자들은 글쓰기란 공통의 취미를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날 백일장에 참여한 신동옥(26)씨는 “워낙 글 쓰는 것을 좋아해 글쓰기 수업만 4개쯤 들어봤다”며 “수업의 특성상 중간에 관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언제나 외로웠는데, 여기선 글쓰기를 취미로 즐기는 이들을 이렇게 많이 만나니 그저 반가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김한솔(24)씨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글을 쓰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 줄 몰랐다”며 “글을 통해 글쓴이를 차차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밝혔다.
◇‘백래시’로부터 안전한 페미니즘 공론장, ‘젠더 살롱’
비슷한 이념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이들이 모이면 살롱은 ‘공론장’으로 변신한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페미니즘 살롱 ‘두잉’도 그렇다. 지난 7일 오후 두잉에서는 책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 출간기념 북토크가 열렸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가 사회자로, 손희정 영화평론가와 홍지아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해 ‘여성 살해’를 주제로 열띤 논의를 펼쳤다. 선착순 30명을 모집했지만 정원을 훌쩍 넘기는 바람에 현장을 방문한 이들은 간이의자까지 동원해 살롱 곳곳을 빼곡히 채웠다.
이날 두잉에 온 이들은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의식적으로 페미니즘 살롱을 찾는다고 입을 모았다. 여성혐오 일색인 일상 공간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백래시’가 두려워 입을 다물곤 하지만 안전한 공론장인 살롱에서는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다는 게 이유다. 김다예(23)씨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이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응원을 받고, 그들과 연대하고 싶어 왔다”며 “내가 예민하게 인지하는 것들을 다른 곳에서라면 하나하나 피곤하게 설명해야 했겠지만 여기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어 편하다”고 말했다. 다른 참여자 장모(20)씨는 “최근 고 구하라씨의 비보가 전해졌을 때 이곳에서 많은 이들과 슬픔을 나눴다”며 “동시대 여성의 비극을 함께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됐다”고 말했다.
북토크에 참석한 이나영 교수도 “페미니즘 살롱에 모이는 것은 투사가 된 페미니스트들의 생존전략 중 하나”라며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활성화하는 동시에, 불법촬영 등의 실질적 위협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공간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요즘엔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공간들이 전에 비해 많이 생기고 있지만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공론장은 흔치 않다”며 “일상적으로 백래시에 노출되는 이들은 평소엔 외로움을 느끼다가도 두잉과 같은 살롱에 오는 순간 자신과 다르지 않은 동료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비로소 재충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슷한 가치관을 기반으로 모인 이들이 그저 서로의 의견에 동의와 공감만을 보내는 공간은 아니다. 단골 손님인 김다예씨는 “모두가 ‘같은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곳을 보다 재미있게 만든다”며 “서로의 의견이 부딪히며 논쟁이 붙을 때마다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보게 되고 그럴 때 사고가 확장되는 경험을 한다”고 말했다.
◇“피곤한 관계는 싫지만 대화는 원해요” 밀레니얼 세대가 살롱을 찾는 이유
‘온라인 세대’인 2030 청년들이 대면 만남을 기반으로 하는 살롱 문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지혜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관계에서의 피로감은 느끼고 싶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경쟁력을 키울 정보를 얻고 싶어 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욕구가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직장 동료 같은 공식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피로감을 굳이 견디려 하지 않으며, 단일화된 ‘스펙’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차별화된 경쟁력을 키우려는 청년 세대의 특징이 살롱이란 공간의 성격과 그대로 맞아떨어졌다는 해석이다.
그는 “물론 익숙하고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어울리면 관계의 피로감은 없겠지만 생산적으로 지식을 향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는 힘들다”며 “직장 바깥의 공간에서 정체성을 찾고 싶어 하는 M세대의 특성상 자신의 관심사를 반영해 전문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전문가들도 ‘면대면 소통에 대한 갈증’을 살롱 열풍의 이유로 꼽았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아동학과 교수는 “밀레니얼 세대가 아무리 온라인 세대라지만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 본능으로부터 예외일 순 없다”며 “온라인 위주의 피상적 관계에서 오는 결핍을 오프라인으로 채우고 싶어 하고, 특히 심도 있는 대화가 가능한 살롱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은서 기자 silver@hankookilbo.com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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