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원나라 황제가 휘종의 그림을 구경하며 감탄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신하가 말한다. “휘종은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 일만은 무능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대답하였다. “임금 노릇만 못했습니다(獨不能爲君). 임금이 임금 노릇을 잘해야지 다른 일을 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人君貴能爲君, 它非所尙也).” 사진은 왼쪽부터 ‘계산추색도’ ‘납매산금도’ ‘메추리와 난초’ 휘종의 작품.

송나라는 문운(文運)이 극성한 나라였다. 건국 이래 문인정치를 표방하여 우수한 학자, 문인들이 대량 배출되어 한학(漢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송학(宋學)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송나라의 건국 과정을 간과할 수 없다.

당나라가 망하고 오대십국(五代十國) 50여년의 혼란기를 수습하던 후주(後周)의 명군 세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황제의 자리는 7세 아들에게 넘어갔다. 이 틈을 타 주변 국가들이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에 후주의 정예부대인 금군(禁軍)이 출전하게 됐다. 그러자 어린 임금을 불안히 여기던 장병들은 전공이 뛰어나고 인망이 두터운 조광윤(趙匡胤ㆍ927~976)을 받들어 제위에 올렸다. 그가 바로 송나라 태조이다.

그러나 조광윤 입장에서는 이렇게 황제를 추대할 수 있는 막강한 군부가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지방에서 할거하던 군사 조직인 번진을 축소하고, 중앙에 정예병을 집중하려 했다. 번진은 실질적으로 독립된 권력을 행사하며 세습되었고, 그 결과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아 정치 혼란의 원인이 됐기 때문이었다. 태조 이후 황제들도 충실히 이 정책을 따르면서 번진들은 문신으로 수장이 교체되었다. 결과적으로 군이 사유화되거나 지방 군벌화 되는 경향은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지자(智者)의 천려일실(千慮一失)이랄까. 한 가지 폐해를 고치려다 조금이라도 지나치면 반드시 그 반작용이 나타나는 것이 세상 이치인가 보다.

예상치 못했던 여러 폐단이 생겨났다. 그 중 하나가 각 분야에서 문신 우위 현상이 지나치게 되어, 군사 방면에는 무능, 무지한 문신들이 전략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를 송나라가 잦은 외침에 시달리게 된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게다가 매년 문과를 보는 사람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문관의 높은 봉급과 여러 우대조치는 막대한 재원을 필요로 하였기에 다시 군사력 약화를 초래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런 군사력의 약화가 부른 대참사가 1127년의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다. 금나라의 공격으로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휘종(徽宗), 흠종(欽宗) 두 황제와 황후, 태자 등 3,0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금나라로 끌려간 사건이다. 중국 역사에 없던 한족(漢族)의 치욕이었다.

이 참극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자가 휘종 조길(趙佶ㆍ1083~1135)이다. 그의 황제로서의 무능을 기술한다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이다. 탐관오리와 수탈당하는 백성, 도적과 민란이 일상이던 ‘수호전(水滸傳)’의 배경이 바로 휘종의 시대이다. ‘수호전’의 주지는 ‘관핍민반(官逼民反)’으로, 즉 ‘관리가 횡포가 심하면 백성은 반발한다’인데, 겉은 화려한데 속은 곪은 것이 휘종 시대의 암울한 사회상이었다. 신기하게도 휘종은 정치력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이 뛰어났다. 시서화(詩書畵)는 기본이고 음악, 조경까지 못하는 분야가 없었다. 지금도 전해지는 그의 글씨나 그림을 보면 황제가 취미 생활로 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원나라 황제가 휘종의 그림을 구경하며 감탄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신하가 말한다. “휘종은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 일만은 무능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대답하였다. “임금 노릇만 못했습니다(獨不能爲君). 임금이 임금 노릇을 잘해야지 다른 일을 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人君貴能爲君, 它非所尙也).”

금나라로 끌려간 휘종은 혼덕공(昏德公)으로 불리는 치욕을 당하며 노역에 시달리다 객사한다. 정강의 변 이후, 송나라는 지금의 항저우로 수도를 옮긴다. 그후 송나라는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다 결국 1279년 원나라의 침략에 망한다. 외침에 시달렸지만 송나라는 최고의 경제 번영을 이루었다. 화폐 사용이 정착되었고, 공업과 상업 또한 번영하여 각지에 대도시가 출현했고,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있다. 북송의 수도 개봉의 영화를 회고한 ‘동경몽화록’과 시민생활을 그린 ‘청명상하도’는 지금 보아도 대단하다.

그러나 도시의 번영과 달리 농민들의 삶은 처참하였다. 황제의 기호를 만족시키는 비용, 늘어나는 관리들에 대한 급여 지출, 끊임없는 외침을 막는 데 드는 군비 및 패전에 따른 배상 등, 그 모든 부담은 민중들의 몫이었다. 후세의 역사가는 이렇게 개탄하였다. “관리들에게는 나라의 은혜가 넘쳐났으나 백성에게는 남김없이 뜯어냈다. 이것이 송나라를 본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설상가상, 문인 우대 정책 때문에 지식인들은 넘쳐났다. 그들은 저마다 무리를 짓더니 우리는 군자당이네 저들은 소인당이네 다투며 소일하였다. 그러나 모두 외적 앞에서는 쩔쩔 맸으니, 백면서생들이 입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송사(宋史)’는 당시를 이렇게 압축했다. “민궁(民窮) 병약(兵弱) 재궤(財匱) 사대부무치(士大夫無恥).” 요새말로 풀면 이런 뜻이다. ‘국민은 곤궁, 군대는 약체, 경제는 바닥, 지도층은 뻔뻔’. 우리가 사는 지금 시대는 어떤 말로 기록하게 될까.

박성진 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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