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 법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 협상이 공전하고 있다. 대타협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더불어민주당은 법안 상정을 강행하고, 자유한국당은 국회법 106조 2항에 보장된 무제한 토론인 필리버스터 행사에 들어가게 된다. 필리버스터(Filibuster)는 작고 날렵한 해적선을 의미하는 스페인어에서 유래했다. 영어에서는 19세기 중반 중앙아메리카에서 활동한 용병 집단을 가리키다 1854년 미국 상원에서 캔자스-네브래스카 법 의결 당시 반대파 의원들이 의사진행을 방해한 것을 계기로 정치적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의 연혁은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로원 의원 카토는 해질녘까지 발언해 법안 처리를 막는 것으로 유명했다. 모든 업무는 황혼 전에 마쳐야 한다는 원로원 규칙을 이용한 것이다. 카토는 당시 집정관이던 카이사르가 발의한 농지개혁법을 저지하는 필리버스터를 시작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여론이 좋지 않자 카토는 곧바로 석방됐고, 해당 법안은 원로원을 우회해 시민이 모인 민회에서 비로소 통과됐다.
□ 해적선에서 어원이 유래해서일까. 필리버스터에는 다양한 꼼수가 동원된다. 테드 크루즈 미국 상원의원은 2013년 ‘오바마 케어’ 예산안을 막기 위해 21시간 필리버스터를 하면서 닥터 수즈의 동화책 ‘초록색 계란과 햄’을 읽기도 했다. 역대 최장인 24시간 18분 동안 발언한 스트롬 서먼드 상원의원은 성경책과 각 주의 선거법 조문을 낭독한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전화번호부나 요리책을 읽은 경우도 있다. 일본 의회에서는 기표소까지 천천히 걸어가는 우보(牛步) 전술을 쓰기도 한다.
□ 우리나라에도 필리버스터 역사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의원이던 1964년 동료 의원 체포동의안 통과를 막기 위해 5시간 19분 동안 원고 없이 발언했다. 최근 사례는 2016년 2월 야당이던 민주당이 정의당, 국민의당과 공조한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다. 총 38명의 의원이 참여했고, 192시간 25분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테러방지법 통과를 막지는 못했다. 이번 한국당 필리버스터도 법안 통과를 막기는 역부족이라는 게 중론이지만 쓸모가 없는 건 아니다. 국민에게 야당의 반대 논리를 호소할 절호의 기회라는 점에서다. 무제한 토론이 장난이 되어선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필리버스터도 결국은 국민 세금이 들어가는 의정 활동이다.
김영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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