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은 언짢았다. 공항 입국 심사장에서, 관광 명소와 가게마다 “(관광) 가이드냐”고 묻는 모양새가 무시하는 투였다. “직원들 데리고 여행 왔습니다.” 정중히 답해도 “그러니까 가이드죠”라는 질문을 다시 받았다. “가무잡잡한 얼굴이라 그러려니 했고 (회사 대표라고) 대접받으려는 마음은 없었는데, 가이드란 직업을 업신여기는 것 같아, 각박한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처럼” 씁쓸했단다.
딱 그것만 빼면 “60년 인생 처음 누려 보는 보람찬 여행”이었다. 인도네시아 유부녀 직원 5명, 4명씩 모시고 두 차례(10월 5~12일, 12~19일) 각 7박8일간 보름에 걸쳐 제주, 설악산, 용문산(경기 양평군), 남이섬(경기 가평군)과 서울 명동, 인사동, 고궁, 롯데월드타워를 누볐다. 사장님은 경비 4,000만원을 댄 것도 모자라 같은 일정에 두 번이나 가이드며, 사진사를 자처했다. 한복 체험하고 싶다던 직원들을 촬영한 사진을 보여 주며 껄껄 웃었다. “아내는 왜 사서 고생이냐고 말렸지만 여행을 마치니 날아갈 듯 기뻤다”라면서. 직원들은 물론 “평생 소원이던 한국을 여행해서 행복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철훈(59) 대표는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남쪽 도시 보고르에서 직원 250명의 작은 박스회사(㈜인도박스우타마자야)를 운영하고 있다. 4,100㎡ 넓이 공장에선 박스 원단을 자르고 상표 등을 박스에 인쇄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트로트 가락이 은연한 공장 2층 한쪽 사무공간의 사장실은 허름해서 정겨웠다. 이 대표는 “직원들이 저를 먹여 살리고 회사를 지탱해 주는데 뭐 대단한 일이냐”고 손사래를 쳤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이 대표도 몰랐다. 2004년 우연히 몇몇 직원의 통장을 본 게 시작이었다. 한국에 가고 싶어서 통장을 만들고 다달이 30만~50만루피아(약 2만~4만원)씩 적금하고 있다는 얘기에 “그럼 비자 발급은 내가 도와줄게” 한 뒤 잊고 있었다. 15년 뒤인 올해 직원들이 드디어 한국에 간다고 하자 퍼뜩 ‘초행길에 패키지여행 보내느니 같이 갈까’ 생각이 들었다. “그 나이와 체력에 감당이 되겠냐”고 걱정하던 아내 이순재(52)씨도 결국 직원들을 평소 가족처럼 여기는 남편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한국인 사장님과 인도네시아인 유부녀 직원들의 ‘신기방기’ 한국 관광단이 꾸려졌다. 이왕이면 더 구경시킬 요량으로 여행 동선도 빡빡하게 이 대표가 직접 짰다. 이 대표는 “죽마고우들이 여행지마다 쫓아와서 음식을 대접하고 차로 데려다줘서 사실 힘든 것도 몰랐다”고 했다. “활짝 웃는 직원들 보고 있으니까 지병인 고혈압도 낫는 것 같다”고 웃었다.
직원들은 한국에 반했다. “공기 맑은 제주는 황홀했다”(유니ㆍ42)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 설악산 풍경이 아름다웠다”(투티ㆍ31) “거리와 개울이 너무 깨끗하더라”(라티ㆍ28) “한복을 입고 고궁에 가는 꿈을 이뤘다”(수미ㆍ25)는 것이다. 외국인도 찾기 쉽게 만든 지하철 시스템에 매료됐고, 70, 80대 노인들이 건강하게 산행하는 모습엔 “매일 인삼을 먹냐”고 물었다. “무엇보다 사장님이 함께여서 든든했다”는 아부도 빠지지 않았다.
이 대표는 그저 주변에서 평생 받은 은혜를 조금 갚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1991년 봉제 무역회사 직원으로 출장 오가며 인도네시아와 연을 맺은 그는 2000년 피도 안 섞인 회사 사주가 실적이 고만고만하던 현지 자회사를 거저 물려주면서 지금의 업체 대표를 맡았다. 조건은 딱 두 가지(망하게 하지 마라, 인도네시아 놀러 오면 차 좀 빌려다오)였단다. 갚지 말라던 돈을 이 대표는 매년 조금씩 사주에게 보내 2012년 회사의 온전한 주인이 됐다. 그는 “학창 시절 학비를 지원하고 사업이 어려울 때 돈까지 빌려준 은사인 이기의 전 강원대 교수와 손 벌릴 때마다 운영자금을 융통해 준 안창섭ㆍ최종섭씨 등 현지 지인들 덕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한참 은인들을 설명했다.
직원들에 대한 애정도 한마디 한마디에 녹아 있었다. “제 직원을 아껴야 저도 아낌 받죠.” “직원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어요.” “사고가 나도 화내지 않아요. 이미 끝난 상황이고, 관리를 제대로 못한 제 잘못이니까요.” “더 주지는 못하지만 덜 주지는 않는 게 목표예요.” “월급 올려줘서 감사하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으면 고마운 한편 미안해요.” “노동조합도 없고 그 흔한 시위도 25년간 한 번도 없었으니 얼마나 감사해요.”
그는 2006년부터 14년째 이슬람의 연례 종교행사인 라마단 기간에 직원들과 함께 한 달간 금식을 하고 있다. “아침마다 커피를 갖다 주는 직원들 보니까 안쓰러워서 ‘나도 같이 하자’고 했다”라며 “처음엔 너무 힘들었고 직원들이 농담으로 여겼는데, 지금은 현지 문화를 존중하고 따르는 저를 직원들이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했다.
값싼 인건비 등 장점이 있는 인도네시아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들에게도 할 말이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보면 좋겠어요. 우리나라 1960년, 70년대처럼 순박하기 그지없어요. 어려운 고비마다 편하게 대해 주고 직원이 잘돼야 회사도 잘된다는 마음으로 일하면 돈은 따라온다”는 것이다. 회사를 물려받을 당시 월 10만달러였던 매출은 현재 월 50만달러로 늘었다.
이 대표는 내년 5월 다른 직원 4명과 3차 한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얼마 전엔 버스 3대를 빌려 직원 150명과 해변으로 야유회도 다녀왔다. 사장이 좋은 이유를 묻자 두위(37)씨가 이렇게 말했다. “명령조가 아니라 늘 상의하는 말투예요.” 비단 인도네시아에서만 통용되는 얘기는 아닐 터다.
보고르(인도네시아)=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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