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평양 도심 한 가운데에 마련된 김일성ㆍ김정일 부자 벽화. 15일 김 전 위원장의 사망 8주기를 맞아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추모와 충성을 강조하는 기사를 냈다. 연합뉴스

‘은둔의 왕국’ 혹은 ‘미지의 세계’. 서방 여행사들이 북한을 소개할 때 내놓는 홍보 문구다. 고립되고 폐쇄적인, 세상과 동떨어진 별종.

북한이 늘 닫혀 있었던 건 아니다. 1950년대 북한은 그 어떤 국가보다도 개방적이었다. 그러던 북한이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근 데는 한국전쟁 이후 세계 곳곳에 내보냈던 전쟁고아와 유학생에 대한 통제 실패 경험이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유재 독일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는 16,17일 서강대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 ‘트랜스내셔널 북한: 잊혀진 기억과 아래로부터의 역사’에서 북한 고립주의의 기원을 북한 주민들의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지리한 휴전협상이 이어지던 한국전쟁 막바지, 북한은 ‘사회주의 지구화 전략’을 적극 활용키로 했다. 소련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국가들끼리 똘똘 뭉쳐 뭔가 도움을 주고 받던 분위기에 올라타서, 아이와 젊은이를 해외에 적극적으로 내보냈다. 전쟁고아들은 중국에 2만명, 루마니아 1,800명, 체코 1,041명, 불가리아 500명, 폴란드ㆍ몽골 각 200명, 헝가리 100명, 집계 되지 않은 소련까지, 대거 해외로 보내졌다. 이들 사회주의 국가로 유학을 보낸 젊은이들도 5,000명에 달했다.

인권 등 여러 차원의 명분이 더해졌지만 진짜 속내는 단 한가지, ‘발전된 선진 사회주의 문명을 온 몸으로 배워 오라’는 것이었다. 유학생은 물론, 전쟁고아까지도 해외로 보내주는 조건은 ‘일정 기간 동안 직업교육을 마친 뒤 귀국하라’는 것이었다. 전후 복구 사업의 전문가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북한 정권의 기대는 허사였다. 고아와 유학생은 북한보다 정치적으로 덜 억압적이고, 경제적으로 더 발전한 다른 나라 문화에 젖어 들면서 여러 일탈을 시도했다. 당시 작성돼 지금도 남아 있는 동독 정부 기록을 보면, 북한에서 온 아이와 유학생에 대해 “새 물건에 대한 욕구가 강하고 오만하다”거나 “낭비가 심하고 퇴폐적인 생활을 한다”는 식의 부정적 평가가 적지 않다. 심지어 일부는 자유에 눈을 떠 서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하기까지 했다. 결국 북한 정권은 해외로 보낸 아이와 유학생을 10년만에 집단 소환해버린다.

북한 내부에서도 선진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지원을 명분으로 북한에 온 동유럽 전문가들은 사회주의 국가 출신이긴 했으나, 동양을 업신여기는 백인이긴 매한가지였다. 그들의 독단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는 북한 정권과 주민들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 교수는 “북한은 약자이면서도 당당하고 뻔뻔한 면이 있었다. 형제국가에 의존적이면서도 종속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경험이 누적되면서 북한은 주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폐쇄적 자주노선의 길로 옮겨간다. 1962년 중소갈등으로 표면화된 사회주의 내부 분열, 김일성 개인숭배 강화 등도 고립주의를 심화시킨 배경이다.

이 교수는 “1950년대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지구화 바람은 ‘사회주의 코스모폴리탄’을 형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북한은 유연성보다 경직성을 내세우면서 실패했다”며 “북한은 아직도 1950년대 지구화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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