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란 무엇인가] <5> 성군(聖君)은 없다 

※ ‘칼럼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한국의 정체성, 역사, 정치, 사상, 문화 등 한국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찾아 나섭니다. ‘한국일보’에 3주 간격으로 월요일에 글을 씁니다.

2008년 개봉한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의 포스터. 브루스 배너 박사가 진짜인가, 아니면 헐크가 진짜인가. 어쩌면 이 질문은 질문 자체가 넌센스일 지도 모른다. 유니버셜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마침내 연말이 왔다. 여전히 공약을 지키지 않고 있는 ‘민주 공화정’ 정부를 원망할 때가 왔다. 일 년 동안 자기 수양을 통해 길러온 인내심을 한껏 충전한 뒤, 컴퓨터를 켠다. 주거래 은행 인터넷 뱅킹 사이트를 방문하고, 굶주린 좀비처럼 뛰쳐나오는 온갖 보안 파일을 차곡차곡 다운받아 설치한다. 공인인증서를 갱신하기 시작한다.

갱신한 공인인증서를 컴퓨터 하드에 저장했다고 해서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에 공인인증서를 복사하기 위해서 앱을 구동하고, 새로 만든 16자리 비밀번호를 쳐넣어야 한다. 바쁜 연말에 이 지난한 과정을 마치고 나면, 뭔가 혁명을 하거나 몹시 단것을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비장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인인증서가 있는 공화정(共和政)과 공인인증서가 없는 왕정(王政)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공화정을 선택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독립적인 정치 주체라기보다는 신민(臣民)에 불과했던, 졸렬한 왕정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무리 세종(世宗)이나 정조(正祖)같은 성군(聖君)이 다스린다고 해도, 왕정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지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성군이라니, 인간이 그토록 대단한 존재일 수 있는 것일까.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지하실에서도 무지개를 보는 혜안을 가지고, 백성의 고통을 눈 녹듯 사라지게 할 신통력을 가진 존재일 수 있는 것일까. 기껏해야 고함을 지르며 서류를 집어 던지는 대신 눈치 없이 색소폰을 부는 직장 상사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내가 만나 본 지구인들은 약간의 책임감과 또 약간의 소유욕과 또 약간의 질투를 동력으로 해서 성실히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주말이 되면 방안에 엎어져 뽁뽁이나 터뜨리며 휴식을 취하는 보통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걔중에는 간혹 제법 그럴싸한 야심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살아 있기에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경우든, 종종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위대한 성군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1년 스펜서 트레이시와 잉그리더 버그만 주연의 영화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한 장면. 절대선을 상징하는 지킬 박사는 마치 성인군자인 양 사회에 선행을 아낌 없이 베풀지만, 그 안에는 약자를 서슴없이 살해하는 악인 하이드의 본성도 함께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왕조시대의 성군이란 완전한 인간이라기보다는, 자아 수양을 통해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들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개의 인간은 날로 먹을 수 있다면 날로 먹으려 드는 존재, 도저히 날로 먹을 수 없다는 것을 통절하게 깨달았을 때야 간신히 노력을 시작하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보통의 인간은 자신의 무능과 이기심을 반성하기는커녕, 남을 탓하면서 자신을 위로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반성을 하더라도, 자신이 반성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전시하려 드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결국 왕조 시대의 임금이 자아 수양을 좋아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늘에 앉아 더위를 좋아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현실에서 만나 볼 수 있는 성인이란, 거래 은행에 공인인증서를 갱신하고 스마트폰에 복사까지 하면서도 정부를 저주하지 않는 인격자 정도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진짜 성군이 된다는 건 저 멀리 은하계처럼 아득한 일이 아닐까. 조선 시대에 성군이란 사실 외계인이 아니었을까.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너무 수줍은 나머지 외계인이 아니라 성군이라고 둘러댄 것이 아니었을까. 왕조시대의 사정이 이러할진대, 공화국의 경우에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데이트 상대가 못생겼는데도 귀엽게 보이면 망한 것이듯, 공화정의 정치인이 성인처럼 보이면 망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성인이 정말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정치공동체의 온갖 고민을 해결해 달라고 외주를 주면 되지 않을까? 정말 성인이 존재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이런 궁금증을 해결할 만한 실마리가 약 10년 전에 발견되었다. 성군으로 알려진 정조가 당시 정계의 거물 심환지(沈煥之)에게 보낸 비밀 편지 다수가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그 편지에서 이른바 성군 정조는 시원하게 욕을 내뱉는다. 이 “호로자식(眞胡種子)이!”

지난 2009년 2월 안대회(가운데) 성균관대 교수 등 연구진이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하고 있다. 노론에 맞선 비운의 성군으로 알려진 정조가 실은 노론의 거두 심환지와 정치적 물밑 거래를 일삼고 있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자료였다. 연합뉴스

그뿐이랴. 폭력으로 을러대는 일마저 서슴지 않는다. “某를 처치하는 데에 한 주먹 힘이면 충분하다.”(處置某也一拳大之力足矣) 정조를 성군으로 존경해왔던 사람이라면 큰 충격을 받을만한 사료임에 틀림없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원균에게 비밀편지를 보내서 “나는 사실 왜놈들 잡아 죽이는 게 너무 재밌어. 내가 열심히 싸우는 건 애국심보다는 살을 벨 때 느끼는 쾌감 때문이야”라고 말했다면 이와 비슷한 충격을 받을까.

그런 충격을 예상했음인지, 정조는 자신의 편지를 읽고 나서 즉시 찢어 버리라고(此紙卽扯之也), 혹은 불태우라고(此紙卽丙之) 요구했다. 그러나 수신자는 끝내 정조의 편지들을 없애지 않았고, 그로 인해 현대의 독자는 이른바 성인의 마음을 좀 더 들여다볼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이런 자료를 통해 드러난 조선 시대 성군의 모습이란 도덕적으로 완벽한 존재라기보다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모습에 가깝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조선 시대 못지않게 도덕적 엄숙주의가 팽배했던 빅토리아 시대 말기에 발표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의 소설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지킬 박사는 마치 성인군자인 양 사회에 선행을 아낌없이 베풀고, 과학적 지식 탐구에 매진하는 신사이다. 반면 그에게 깃들어 있는 또 다른 존재인 하이드는 약자를 살해하기 서슴지 않는 흉악한 인물이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고통을 주든 거기서 짐승처럼 게걸스러운 쾌락을 느꼈고, 타인의 고통에 대해 돌부처처럼 무감각했네.” 이러한 하이드의 모습은 이성적이고 차분한 과학자 브루스 배너 박사에 깃든 헐크의 모습을 닮았다. 혹은 성군 정조에게 깃든 욕쟁이 중년 사내를 닮았다.

정조가 희대의 성군이라는 이미지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데는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이 큰 역할을 했다. 사진은 이 소설을 영화화한 '영원한 제국'에서 정조 역을 맡은 안성기.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조선 시대의 성군이나 빅토리아 시대의 지킬 박사를 위선자라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호로자식!”이라고 욕을 했다고 해서, 정조가 꼭 염치없는 사람이고, 자신의 몰염치함을 가리기 위해 성인이라는 위선의 탈을 썼다고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어쩌면 그 두 모습 모두 정조의 진면모인지도 모르기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헨리 지킬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위선자라 부를 수는 없었네. 내 양면은 둘 다 아주 진지했기 때문이지. 나는 절제를 벗어 던지고 수치스러운 일에 덤벼들 때나, 밝은 대낮에 지식의 향상이나 슬픔과 고통의 경감을 위해 열심히 일할 때 모두 나 자신에게 충실했거든.”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정조에게 비밀 편지를 들이대며 왜 욕지거리를 하느냐고 따져 묻는다면 정조는 이렇게 대답할는지 모른다. “나를 위선자라 부를 수는 없네. 내 양면은 둘 다 아주 진지했기 때문이지. 내가 백성들 앞에서 성인군자 행세를 할 때나, 남들이 안 볼 때 쌍욕을 해댈 때나, 모두 나 자신에게 충실했거든.” 그렇다면 이것은 위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은 참으로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처럼 인간은 이중적 존재, 아니 다면적 존재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인간은 하나의 통합된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서 사회에 참여한다. 마치 하나의 국가가 통합된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서 국제기구에 참여하는 것처럼. 다만, 그 인간의 정체성이 생각보다 조화로운 요소의 결합이 아닐 뿐. “인간이란 궁극적으로 각양각색의 조화롭지 않고 독립적인 시민들이 모인 정치체로 밝혀지게 될 거라고 감히 추측하네.”

관리, 성인, 유아, 외국인, 자본가, 노동자, 실없는 사람 등 다양한 구성원이 모여 갈등 속에서 하나의 정치체를 이루어 살 듯이, 뇌, 십이지장, 쓸개, 임파선, 전립선, 이성, 감정 등이 모여 불협화음 속에서 그럭저럭 하나의 인격체로서 살아나간다. 하나의 정치공동체에서건, 한 명의 인간에서건, 이 아슬아슬한 통합을 이루어내는 기제가 바로 정치적 정체성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인간을 정치체에 비유한 것은, 일견 조화로워 보이는 인간이나 사회에도 존재의 분열이 있다는 것, 인간의 두뇌와 위장은 항상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라는 것, 오른손에게 해로운 일을 왼손이 저지르기도 한다는 것, 계급 간, 지역 간, 젠더 간에는 갈등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 분열을 재조정하는 것이 바로 정치다. 존재의 분열을 인정하는 한 정치는 불가피하고, 정치를 긍정하는 한 존재의 분열을 인정해야 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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