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훈 목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가 12일 오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로 조사를 받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경찰은 지난 10월 3일 열린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경찰에 폭력을 행사하도록 주도한 혐의로 전 목사를 상대로 이날까지 5번 출석 요구를 했고 전 목사는 4번이나 응하지 않다가 이날 처음 출석했다. 뉴스1

2006년 주요 정부기관이 과천에 자리잡고 있던 시절 벌어진 사건 한 토막이다. 당시 정부청사 앞 공터에서 열린 모 의료인 단체 주관 집회 도중 단상에 오른 한 명이 할복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스스로 배를 가르는 극단적인 선택을 동원해 어떻게든 집회의 동력을 끌어올리려는 무모한 행동으로 보였다. 점심을 먹던 보건복지부 출입기자들은 부랴부랴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칼을 들었다고 알려진 당사자는 병원으로 옮겨진 이후였고 집회는 황급히 마무리된 듯했다. 할복 현장이 발각되면 일을 그르칠지 모른다는 불안이 작용한 듯, 목격자들마저 자해의 결과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옮겨진 병원측은 “회복 중이다”는 답을 전해왔다. 다만 입을 닫았던 현장과 마찬가지로, 병원은 물론 집회 주관 단체 관계자 누구 하나 상처의 정도와 사건의 올바른 스토리를 말해주지 않았다.

도대체 그는 왜 스스로 흉기를 몸에 댔는지, 무엇을 위해 결기를 내세웠는지에 대해 더 이상 궁금증이 이어지지 않을 때쯤, 병원 관계자들을 통해 전해 들은 사건의 전말은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외과의사인 장본인은 크게 상처를 입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적당히 충격 받을 만큼의 피를 흘리도록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문구용 커터를 흉기로 선택했고, ‘어긋남’이 없도록 전날 밤 수 차례 돼지고기를 도마에 올려놓고 칼질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행여나 칼날이 깊이 들어가지 않도록, 그렇다고 너무 얇게 상처를 내지 않도록 말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의 도덕성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던 때, 결기가 사회를 이끌던 시절의 소극이다.

국어사전에서 결기는 ‘못마땅함을 참지 못하고 거칠게 행동하는 성미’ 혹은 ‘결심하여 힘차게 일어선다’는 의미로 정의된다. 때로는 성마른 품성을 뜻하지만, 경우에 따라 주저하지 않고 의지를 실천하는 기질을 설명할 때 쓰인다. 이러한 이중적인 정의 탓일까. 지금도 우리 사회에선 극단적이고 가치지향적이며 거친 의사표현과 행동이 사뭇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올바른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는 것 같다.

지난 한 해를 돌아봐도 이렇듯 잘못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결기가 여전히 곳곳에서 표출되며 집단, 계층, 세대간 형성된 갈등의 골을 깊게 키워왔다. 우리는 이른바 ‘조국 사태’를 겪으며 공정한 토론의 룰이 작동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장으로써 역할을 다해야 할 인터넷 공간에서 의기를 앞세운 폭력을 수없이 목격했다. ‘성적 우월’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기치를 내걸고 폭언을 쏟아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잘못된 결기도 있었으며, “대통령을 죽여라”고 소리치며 선동한 종교인도 지켜봤다.

역사학자 한명기 명지대 교수가 최근 내놓은 저서 ‘최명길 평전’은 명분을 앞세운 결기에 반대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던 이조판서 최명길이 어떻게 역사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었는지 잘 보여준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였던 그는 결과적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성사시킨 인물로 청나라와의 항전을 주장했던 예조판서 김상헌과 비교되며 매국노라는 욕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최명길에 대해 ‘결기를 누르고 국민과 조정을 구해낸 합리적인 신하’라 칭하는 평가도 있다. 당대의 문인 이식은 “김상헌도 최명길이 열었던 (남한산성)문을 통해 나갔다”라는 말로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했던 최명길의 선택이 어떻게 나라를 보존했는지 전했다.

결기를 보여주기 위해 뽑아 든 칼날은 기세 좋게 번쩍일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억울한 생살을 베어낼지 모를 일이다. 결기만으로 움직이는 사회일수록 그래서 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는다. 새해에는 힘이 좀 빠지더라도, 결기가 주목받는 일이 줄어들기를 바래본다.

양홍주 정책사회부장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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