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교사를 꿈꾸다 가업을 잇고 자연인으로 생을 마무리한 구자경 명예회장

알림

교사를 꿈꾸다 가업을 잇고 자연인으로 생을 마무리한 구자경 명예회장

입력
2019.12.14 12:26
수정
2019.12.14 13:21
0 0
14일 별세한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생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4일 별세한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생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4일 94세로 별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구인회 창업회장의 뒤를 이은 ‘2대 회장’으로 25년간 재직하면서 LG를 지금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경영인으로 평가 받는다.

1925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 고인은 1950년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의 부름을 받고 LG그룹의 모회사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이사로 경영에 처음 발을 들였다. 고인은 구 창업회장의 6남 4녀 중 장남이다.

LG화학 부산 연지동 공장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구인회 창업회장((왼쪽부터), 구평회 창업고문,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 회장. LG 제공
LG화학 부산 연지동 공장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구인회 창업회장((왼쪽부터), 구평회 창업고문,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 회장. LG 제공

구 명예회장을 두고 재계에서는 “현장을 잘 아는 경영인”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현장 수업‘을 고집한 창업주이자 부친인 구인회 회장으로부터 혹독한 경영 수업을 받았던 것. 고인이 처음 락희화학에 입수해 발령 받은 곳도 서울에 있는 화장품연구소였다. 그 곳에서 고인은 럭키크림 생산을 직접 담당하면서 가마솥에 연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었고, 박스에 일일이 제품을 넣어 포장해 판매 현장에 들고 나갔다고 한다. 배달 과정에서 뚜껑이 파손되는 일이 잦자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크림통 뚜껑을 만들겠다고 직접 나서기도 했고, 집 뜰의 가마솥에서 원료를 녹이면서 실험을 했다고 그룹은 전했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허름한 야전점퍼를 기름에 묻히고 다니는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며 “누구보다 현장을 잘 알았기 때문에 또 누구보다 지금의 LG그룹의 모습대로 혁신을 무리 없이 잘 해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지인들이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에게 “장남에게 너무한 거 아니냐”고 묻기도 했지만 구 창업회장은 “대장간에서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도 수 없는 담금질로 무쇠를 단련한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를 게 없다”고 현장 수업을 고집했다고 한다.

1985년 4월 구 명예회장이 금성정밀(현 LG이노텍) 광주공장 준공식에서 공장을 둘러보는 모습. LG그룹 제공
1985년 4월 구 명예회장이 금성정밀(현 LG이노텍) 광주공장 준공식에서 공장을 둘러보는 모습. LG그룹 제공

고인은 회사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기 위해 연구개발 투자로 핵심 기술을 확보하는 데 특히 주력했다.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거기에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결합해 철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를 하면서 기술 연구개발에 승부를 걸어왔던 것이다. 고인이 재임하던 25년 동안 ‘연구개발의 해’, ‘기술선전’, ‘연구개발 체제 강화’ 등 표현만 달라졌을 뿐 해마다 ‘기술’이 항상 LG의 경영 지표로 내세워졌던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룹은 이 같은 구 명예회장의 기술에 대한 믿음 역시 어린 시절 경험에 기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작물을 가꾸는 방식에 따라 열매의 크기와 수확량이 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과학과 기술에 관심을 가졌다고 전했다.

그 결과 LG그룹은 모태인 화학과 전자뿐 아니라 정보기술(IT), 부품ㆍ소재 등 다양한 영역으로까지 발을 넓힐 수 있었다. 실제 구 명예회장 재임 기간 설립한 국내외 연구소만 70여개에 이르며 중국, 동남아시아, 동유럽, 미주 지역 등에 LG전자와 LG화학 해외 공장 건설을 추진해 글로벌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처음 연구소가 꾸려진 것도 1976년 금성사(현 LG전자)였고 1979년에는 대덕연구단지 내 민간연구소 1호인 럭키중앙연구소를 출범시킨 것도 고인의 의지였다.

고인은 은퇴를 석 달 앞둔 1994년 11월, 혼자서 전국 각지에 위치한 LG그룹 소속 연구소 19개소를 찾아 둘러 보기도 했다. 훗날 그 때 심정을 ‘마음이 흐뭇함으로 가득 찼다’고 회고했다고 전해진다.

LG그룹은 구 명예회장이 취임한 1970년 매출 260억원에서 25년이 지난 1995년 30조원 규모로 성장했다. 사원 수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증가했다.

고인은 회장 재직 당시 ‘인간존중의 경영’을 강조했다. 사람과 자본, 기술과 설비 등 기업 활동에 필요한 여러 요소가 있지만 그 중에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수 차례 강조했다.

고인의 사람에 대한 애정은 그룹 내 임직원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었다. LG전자의 서비스센터를 비롯해 당시 LG가 사업하고 있는 분야에서 고객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는 찾아다녔다. 그 때마다 그는 “고객의 입장에서 듣고 생각하라. 이것이 혁신이다”라는 말을 강조했다고 그룹 관계자들은 말했다. 그룹 내부 사내 문서의 결재란에 ‘고객결재’ 칸을 회장 결재 칸 위에 따로 만들었던 것도 고인의 뜻이었다.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 인간존중의 경영‘은 그가 재임 시절 내세운 LG의 핵심 경영이념이자 문화였다.

또한 고인은 총수의 수직적인 리더십에서 벗어나 전문경영인에게 경영 권한을 이양하고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하는 ‘자율경영체제’를 그룹 문화로 확립했다.

구자경 LG명예회장이 고 구본무 전 LG회장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구자경 LG명예회장이 고 구본무 전 LG회장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고인은 1995년 1월 럭키금성 명칭을 LG로 바꾸고 장남인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기고 물러났다. 이를 두고 고인은 훗날 회고에서 “은퇴에 대한 결심은 1987년 경영혁신을 주도하면서 시작했다. 내 필생의 업으로 경영혁신을 생각하게 됐고, 혁신의 대미로 나의 은퇴를 생각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고인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LG연암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연암공업대학과 천안연암대학 등을 지원하고, LG복지재단을 통해 사회공헌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구 명예회장은 1972년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1982년 한국산악회회장, 1987년 제18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한 이력도 있다.

고인은 은퇴 후 충남 천안시에 있는 연암대학교 농장에서 머물면서 버섯연구와 나무가꾸기 등 자연과 함께 생을 보냈다. 그는 생전 “내가 가업을 잇지 않았다면 교직에서 정년을 맞은 후 지금쯤 반듯한 농장주가 돼 있지 않았을까”라는 말을 즐겼다고 한다. 부인 하정임 여사는 2008년 1월에 별세했고, 지난해 5월에는 장남인 구본무 회장을 먼저 떠나보냈다.

남상욱 기자 thoth@hankookilob.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