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서울 한복판에서 전기 없는 일상 만나는 ‘비전화(非電化) 카페’

알림

서울 한복판에서 전기 없는 일상 만나는 ‘비전화(非電化) 카페’

입력
2019.12.15 10:00
0 0

 빛은 등불로, 난방은 난로로, 커피도 가스불에 직접 굽고 

 “전기 없는 삶도 가능할까라는 고민 던져 주고 싶다” 

서울 은평구 혁신파크 내에 위치한 비전화 카페 건물. 정해주 인턴기자
서울 은평구 혁신파크 내에 위치한 비전화 카페 건물. 정해주 인턴기자

전기 없는 하루는 어떤 모습일까. 여름에는 에어컨은 물론 냉장고도 없고, 해가 짧아지는 겨울에는 히터와 전등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에 대안은커녕 전기가 우리 삶에 어디까지 들어왔는지조차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전기 없는 삶은 우리에게 상상조차 불가능한 영역이다.

9일 오후에 방문한 비전화(非電化) 카페는 전기에 의존하지 않는 삶을 실험하고 있었다. 서울 은평구 혁신파크에 위치한 카페에는 흔한 무료 와이파이도, 콘센트도 찾아볼 수 없다. 전등 대신 등불이 공간을 비추고, 히터가 아닌 등유 난로와 화목 난로로 난방을 하고 있었다. 불을 땐 지 얼마 되지 않아 공간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카페의 영업시간은 오후 12시부터 6시. 가장 밝을 때 문을 열어 해와 함께 문을 닫는다.

카페는 비전화공방서울의 프로젝트로 지난해 11월 문을 열었다. 공방은 일본의 발명가 후지무라 야스유키씨가 설립한 비전화 공방을 모토로 2017년 서울 혁신 파크에 세워졌다. 이 공방은 에너지와 화학물질에 의존하지 않고 삶을 스스로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곳에서는 농사를 직접 짓기도 하고, 전기 없이 작동되는 물건을 발명하기도 하며 과도한 기술로부터 자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

카페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계됐다. 콘크리트가 아닌 나무와 흙, 볏짚으로 이루어진 건물은 공방의 제작자 24명이 전기와 화학물질 없이 비전화 건축을 해보겠다는 시도 끝에 탄생할 수 있었다. 건축 과정에 참여한 제작자 중 5명이 운영자가 되어 전기 없이도 풍요로운 일상을 선사하겠다며 카페를 꾸려나가고 있다.

카페의 대표 메뉴인 ‘사이폰 커피’를 제조하는 과정. 불로 인해 생기는 기압 차를 이용해 커피를 만든다. 비전화 카페 제공
카페의 대표 메뉴인 ‘사이폰 커피’를 제조하는 과정. 불로 인해 생기는 기압 차를 이용해 커피를 만든다. 비전화 카페 제공

이곳에서 제공하는 메뉴는 총 8개다. 커피부터 차와 핫초코까지 단출한 메뉴들은 모두 전기 없이 만들어진다. 특히 커피는 다른 카페보다 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커피콩을 비전화 로스팅기에 넣고 가스불에 직접 볶는다. 볶아진 원두를 수동 그라인더로 갈아낸 후, 모카포트에 넣어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면 한 잔의 커피가 완성된다. 카페의 대표 메뉴인 ‘사이폰 커피’는 기압의 원리를 이용해 원두를 커피로 바꾼다. 기압차에 의해 커피가 제조되는 모습은 흡사 과학 실험 같기도 하다. 커피 한 잔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에서 카페 운영진들의 고민과 정성을 엿볼 수 있다.

사람의 손길이 꾸준히 들어가야 하는 만큼 커피를 만드는데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비전화 카페에서는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커피는 바삐 사서 나가야 하는 소비의 대상이 아닌 여유를 선사해주는 즐거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비전화 카페의 운영자 박진철(26)씨는 “느린 과정 덕분에 커피가 내 삶에 스며들 수 있었다”며 “모든 과정에 정성을 쏟자 제가 커피를 만든다는 느낌이 들어 돌아오는 피드백 하나에도 행복하게 된다”고 말했다.

생소한 도전인 만큼 시행착오도 있었다. 카페를 열고 처음 맞이한 여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카페에 에어컨은 물론 냉장고까지 없던 탓이다. 냉방은커녕 아이스 음료조차 만들 수 없었다. 얼음을 얼리는 과정조차 전기가 들어간다고 생각해 뜨거운 음료만 제공한 것이다. 날씨가 이러니 카페에 오는 손님도 줄어들었다.

카페는 고민 끝에 엄격한 비전화를 고집하지 않고 선을 찾았다. 아이스 팩을 사와 음료를 식히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스팩을 얼리는 전기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경책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것이다. 박씨는 “하나의 방법만을 고집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즐거울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고 밝혔다.

비전화 카페라고 해서 무조건 전기를 사용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기가 없어도 되는 곳을 찾아 느림의 가치를 실현해간다. 진공청소기보다는 빗자루로 카페를 청소하고, 일반 정수기 대신 숯으로 수돗물의 염소를 걸러내는 정수기를 사용하며 과도한 자원 사용을 줄여나가고 있다. 박씨는 “이렇게 다양한 방법을 알려주고 선택지의 폭을 넓힌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어두운 날 카페를 찾아온 손님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다. 비전화 카페 제공
어두운 날 카페를 찾아온 손님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다. 비전화 카페 제공

그들의 도전은 다채로운 삶을 보여준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이곳의 운영자 박진철씨도 삶의 다른 길을 제안해줄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카페를 꾸려나가고 있다. 그는 “우리는 정해져 있는 루트처럼 살아가는 게 맞는 거라고 배웠지만 사실 다양한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며 “카페가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서울혁신파크 지도. 비전화 카페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서울혁신파크 제공
서울혁신파크 지도. 비전화 카페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서울혁신파크 제공

정해주 인턴기자 digital@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