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121)] 부모님과 호주 자유여행 4편
모든 게 생경하다. 자꾸 두리번거린다. 눈이 편안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서호주의 시린 자연 속에 있다가 시드니로 건너오니, 아찔한 속도에 두려움까지 몰려왔다. 시드니는 고층 빌딩과 그것들을 연결하는 점ㆍ선ㆍ면으로 구성된 디자인 세상이다. 멍했다. 비행 시간이 너무 이른 탓이기도 했다. 꼭두새벽에 출발하는 시드니행 비행기를 예약한 게 잘못이었다. 국내선이라 시간 여유가 충분한데도 준비성이 철저한 부모님 덕분에 탑승 2시간30분 전 공항에 도착했다. 새벽 손님을 받은 우버 기사는 참 밉상이었다. “공항 가는 거 맞아요? 오늘 아침 퍼스공항의 첫 손님이 될 것 같네요.” 나도 안다, 충분히 알아.
◇시드니 첫 날 “너무 빨라. 그냥 우리 스타일대로, 응?”
달링하버(Darling Harbor) – 루나파크(Luna Park) – 밀슨스 포인트역(Milsons Point Station) – 하버브릿지(Harbor Bridge) – ‘양산박’ 식당
자, 시드니 뚜벅이 여행의 시작이다. 첫 날은 ‘머뭄투어’ 여행사가 주관하는 야간 투어에 ‘올인’하기로 했다. 한국인 가이드와 함께 시드니의 밤 풍경을 훑는 ‘압축 워킹투어’다. 효율과 편의, 게다가 무료라니 무릎을 탁 쳤다. 유레카! 지도로만 보던 시드니를 몸에 익히는 기회가 되겠지, 가이드로서의 짐을 내려놓고 나도 졸졸 따라다니면 되겠지, 그렇게 기대했다.
사무실에서 간단하게 미팅을 마친 후, 동행 여행자들과 달링하버 피어몬트베이(Pyrmont Bay)에서 페리를 타고 루나파크에 닿았다. 부모님 취향과는 동떨어진 이 놀이공원에 온 목적은 단 한 가지, ‘인증샷’ 촬영이다. 오페라하우스를 옆에 끼고, 하버브릿지 아치 아래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야경이 프레임 안에 들어온다. 찰칵, 찰칵. 웬만한 시드니의 엽서 사진은 여기서 탄생한다.
일행이 뭔가에 쫓기듯 하버브릿지 북쪽 출입구인 밀슨스포인트역으로 향했다. 겨우 400m인데 오르막길이다. 어둠은 짙고 가이드는 빨랐다. 뒤통수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체력이 바닥난 부모님에게 빠른 걸음으로 하버브릿지를 건너게 한 건 큰 실수였다. 허들 같은 계단을 올라 겨우 가이드를 따라잡았다.
“이게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 중 하나예요.”
두둥. 맞다. 세계에서 6번째로 긴 아치형 다리다. 1,149m 길이에 8차선 도로와 2개의 철로, 보행자 및 자전거 탑승자가 59m의 폭을 나눠 누린다. 좌측으론 보호 철강 사이로 서큘러키의 빛이 터져 나온다. 몸은 후들거렸지만 야경은 눈부시다. 돛을 재해석한 오페라하우스는 결코 정박하지 않는 요트의 자유로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이미 지쳐 있었다. 급기야 아빠는 다음 목적지인 시드니 천문대(Sydney Observatory)에 닿기 전 벤치가 보이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만 더 힘내면 안 돼? 가이드로부터 오늘 저녁 식당을 추천받을 계획도 다 틀렸잖아.’ 눈치껏 가이드에게 이별을 고했으나 속으론 아빠에게 단단히 뿔이 나 있었다.
시드니에서도 어김없이 찾아낸 한인식당 안. 내 접시에 두툼한 고기 한 점을 놓으면서 아빠는 그제야 무거운 입을 열었다. “걸음이 너무 빨랐어. 쉴 틈도 전혀 없고.” 더 못 따라가겠단 말을 꽤 미루고 미뤘던 모양이다. 애초 나의 계획은 누구를 위함이었나? 부모는 왜 그리 딸의 눈치를 보는 건가? 짜증은 평생 이기적인 딸의 전유물인가? 피곤이 애꿎은 책망을 불렀다. 무엇보다 깊고 긴 잠이 필요했다.
◇알아 두면 요긴한 정보①
●호주ㆍ뉴질랜드 전문 여행사인 ‘머뭄투어’는 시기에 따라 무료로 ‘굿모닝 시드니’ ‘굿이브닝 시드니’ 및 ‘굿모닝 본다이’ 투어를 진행한다. 한국인 가이드가 동행해 속성으로 지리를 익히는데 요긴할 뿐 아니라 ‘인증샷’ 포인트는 확실히 챙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러 관광 명소를 한정된 시간에 둘러보기 때문에, 어르신과 여행할 경우 체력 상태를 수시로 체크할 것. 무리다 싶으면 중간에 빠져도 괜찮다. ●시드니의 한국식당 ‘양산박’은 ‘듬뿍듬뿍’을 캐치프레이즈로 한 고깃집이다. 갖가지 야채와 김치, 소스 등이 부족하다 싶으면 수시로 채워진다. 저녁 시간대엔 고기 요리를 주문해야 갈비탕 같은 단품 요리를 맛볼 수 있다. 호주에서는 경이롭게 늦은 오후 11시까지 영업한다. 삼겹살은 13호주달러(약 1만원), 양념 돼지갈비는 18호주달러(약 1만4천원)다.
◇둘째 날 “아직도 몰랐어? 우린 도시보다 자연이야.”
안작 메모리얼(Anzac War Memorial) & 하이드파크(Hyde Park) – 세인트메리 대성당(St Mary’s Cathedral) – 더갭 룩아웃(The Gap Lookout) – 왓슨스베이(Watsons Bay) – 시드니 피시마켓(Sydney Fish Market) – THE BAB 식당
도시 중심에 대형 공원을 조성한 건 호주의 특장점이다. 빽빽한 나무가 도시의 방파제다. 잎이 부딪히는 싱그러운 소리와 이파리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살이 걸음을 새뜻하게 한다. 오늘 하루도 새롭게 태어났다. 하이드파크는 우산 모양의 무화과나무 길이다. 그 시작점의 안작 메모리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호주 및 뉴질랜드 참전 용사를 기리는 기념관이다. 얼음 같은 외관과 달리 내부의 조각상은 불같다. 호소하듯 울부짖는다. 이곳부터 하이드파크를 거닐면 세인트메리 대성당의 첨탑이 발길을 끈다.
“이건 무슨 나무지? 여보, 이파리 좀 봐요. 퍼스와는 또 다르네.”
시내를 좀 더 거닐어 볼까 하다가 왓슨스베이로 방향을 틀었다. 부모님의 얼굴 날씨(?)를 살피는 게 습관이 된 까닭이다. 두 분 표정은 확실히 인공미보다 자연미에 밝게 반응했다. 대성당 근처에서 왓슨스베이까지는 324번과 325번 버스로 갈 수 있다. 시내를 훑던 버스는 울퉁불퉁 왓슨스베이로 진격한다. 비키니 차림의 아이들이 깨알 같은 웃음으로 탑승했다. 더갭 룩아웃, 바로 그 전망대 앞에 버스가 정차했다.
“와, 여긴 또 다른 세상이네!”
세상의 끝이다. 같이 걷던 부모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보도는 해안 절벽 위를 안전하게 활보하도록 길게 뻗어 있다. 수직 낭떠러지 위로 수평의 주택이 옹기종기 꼬리를 문다. 이 열린 바다의 반대편은 시내로 연결되는 바닷길이다. 시드니는 맨리와 이 왓슨스베이가 삐죽이 고개를 뺀 사이로 바닷물이 흘러 들어와 만을 형성한 곳에 자리 잡았다. 페리는 단연 시드니 여행의 숨 길이다. 탑승을 기다리는 사이, 명랑하게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바다 정취를 즐겼다.
아빠ㆍ엄마와 나란히 갑판에 섰다. 두 분의 선한 표정에 시선을 떼지 못한다. 리듬감 있는 스카이라인 아래로 출렁이는 바다에 요트와 보트가 하얀 물살을 수놓았다. 여행이라는 게 별건가. 딱히 뭔가를 보는 것보다 셋이 함께 있다는 그 느낌이 좋았다. ‘그래, 우리 쉬엄쉬엄 여행합시다.’ 대관절 속도가 뭐 그리 중요한가. 감상에 젖고 있을 때 아빠의 한마디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숙소 근처에 한인식당이 있더라고. 우연히 찾았어. 부대찌개 어때?”
현지 음식을 즐기는 게 여행의 묘미라는 것 따위 부모님과의 여행에선 버리기로 했다. 최대한 편하고 좋아하는 것만 누리고 가소서. 언제 또 이리 함께 여행할 기회가 있을까.
◇알아 두면 요긴한 정보②
●왓슨스베이는 평일에도 소박한 주말 느낌이다. 건너편 갭팍에는 남북으로 바다를 끼고 산책로가 이어진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북쪽 끝인 혼비 라이트하우스(Hornby Lighthouse)까지 향하는 반나절 코스도 좋다. 시내에서 버스로 이동해 페리를 타고 시내로 돌아가는 방향을 추천. 언제나 더 흐뭇한 끝이 인상에 남는 법이니까. ●시드니 피시마켓은 중국인 손님이 8할인 수산시장. 갖가지 해산물을 다양한 조리로 내놓는다. 딱히 가격이 저렴하다거나 특유의 활력을 찾기엔 부족하다. 이동 경로의 선택사항 정도로 고려할 것. ●THE BAB 식당은 헤이마켓에 있는 숨은 한인 맛집이다. 여러 메뉴가 붙은 현대식 외관과 달리 국물에 내공이 있다. 특히 2~3인용 전골류는 가성비가 훌륭하다 못해 돈을 번 기분. 부대찌개 전골을 셋이서 최선을 다해 먹고도 포장해왔다. 반찬까지 챙겨주는 마음도 참하다.
◇셋째 날 “그래, 기차 한 번 더 타자.”
블루마운틴 국립공원(Blue Mountains National Park) : 시닉 스카이웨이(Scenic Skyway) 클리프 뷰 룩아웃(Cliff View Lookout) 당도 – 시닉 케이블웨이(Scenic Cableway)로 하강해 시닉 워크웨이 활보 – 시닉 레일웨이(Scenic Railway)로 고속 상승
“오늘은 블루마운틴을 갈 거야. 시드니 중앙역에서 기차 타고 2시간 정도 걸려. 3종 교통수단 세트로 산속을 탐험하게 될 거야.”
간단한 브리핑과 함께 기차에서 ‘스르륵’ 단잠에 빠졌다. 눈을 뜨니 거짓말처럼 카툼바(Katoomba)역이다. 역을 등지고 바로 맞은편으로 직진하니 블루마운틴 입구로 향하는 버스 정거장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가는 길목답다. 다국적 언어가 쉴 새 없이 재잘거린다. 우린 ‘세자매봉’을 가장 처음 맞이할 에코포인트 룩아웃을 생략하고 바로 시닉월드 입구에 닿았다. 해발 1,030m다.
시닉월드는 블루마운틴의 축소판이다. 3종 세트 교통수단을 이용해 핵심 풍경을 둘러본다. 그 세 가지는 블루마운틴의 탐색전이라 할 노란 ‘시닉 스카이웨이’, 숲 속 탐방로까지 510m 하강하는 파란 ‘시닉 케이블웨이’, 마지막은 담력을 시험하는 52도 각도의 붉은 기차 ‘시닉 레일웨이’다. 그 중간에 목재 데크길인 ‘시닉 워크웨이’도 걷는다. 계곡과 동굴을 헤쳐나가는 전천후 모험은 없지만 편하고 짜릿하다.
알고 타면 더 흥미로운 게 바로 시닉 레일웨이다. 경사 52도,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철도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2위는 48도인 스위스 ‘슈토오스(Stoos) 레일웨이’다. 시작은 1878년 탄광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 40곳의 광산에서 채굴된 석탄과 유혈암(oil shale)이 이 절벽 철로를 통해 세상 밖으로 올려졌다. 위기는 다른 의미로 기회라 했던가. 석탄산업이 내리막길에 접어들 무렵, 명석하게도 관광 상품으로 전환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당시 이름은 ‘마운틴데블(Mountain Devil)’, 무시무시한 산악 악마 열차였다. 그럴 만도 하다. 증기 구동 방식인데다 사람이 튕겨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오픈형 화물차였으니. 1928년부터 1945년 사이 운행 방식은 더 어이없다. 주중엔 석탄과 유혈암을, 주말엔 승객을 날랐다는 기록이 있다. 다행히 현재는 관광객의 모험심만 올리고 내린다. 짧은 비명도 함께다. 예사롭지 않은 기울기의 좌석에 착석한 순간 탑승객의 담력이 시험된다. 부모님의 얼굴도 단단히 굳어졌다. 이어지는 약 80m의 암흑 터널은 긴장의 증폭제! 재미있기도 했지만, 괜히 짓궂은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한 번 더?”
5초 정도 망설인 거 눈치챘다.
“그래, 한 번 더!”
두 번을 더 타고, 우린 여정의 막바지인 멜버른으로 넘어갔다.
◇알아 두면 요긴한 정보③
시닉월드 이용법 : 여러 한인 여행사를 검색해 볼 것. 공식 홈페이지에 적힌 것보다 낮은 가격에 무제한 탑승 ‘데이패스’를 판매한다. 입장 시 여행사가 준 바우처를 손목밴드와 교환하면 된다. 재미와 모험의 강도를 더하기 위해 시닉 스카이웨이, 시닉 케이블웨이를 차례로 탑승한 후, 탐방로를 걸으며 유칼립투스 향을 가득 마시고 난 뒤 시닉 레일웨이에 오를 것을 추천한다.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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