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도 국회도 내팽개친 국민연금 개편
나랏빚은 늘어만 가는데 그저 “괜찮다”
청년, 청년 외치면서 그들 미래 담보로
기자 생활을 하다 보면, 참 무모한 일에 노력을 들였다 싶어 화가 날 때가 있다. 의지도 없으면서 면피성 대응을 하는 정부에 순진하게 끌려다녔음을 뒤늦게 확인한 경우가 그렇다.
복지 분야 담당 부서의 데스크를 맡고 있던 지난해였다. 정부는 호기롭게 국민연금 개편안을 밀어붙였다. 보건복지부 출입기자를 닦달하며 개편안 방향에 대해 집요하게 취재하고 기사를 쓰게 했다. ‘단독’이란 컷까지 붙여 정부 개편안을 입수해 보도하는 등 열의를 보였다.
호들갑이었다. 원래 의사 결정을 할 때 복수안을 제시하는 건, 상대방 의사를 존중하는 것처럼 포장하면서도 자신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셈법이 깔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말 정부가 국회에 올린 안은 무려 4가지. 정부가 핑퐁으로 떠넘긴 일을 얄팍한 국회가 처리할 거라 기대했을 리는 만무하다. 얼마 전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국회의원 마음이 95%는 지역구에 있다. 현실적으로 21대 국회가 구성되고 난 뒤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또다시 국회에만 책임을 떠넘기고 정부는 슬쩍 발을 뺀다. 참 가식적이다. 이대로 방치하면 700조원이 넘는 국민연금기금은 2054년(국회예산정책처 추정)에 고갈된다. 지금의 청년들이 은퇴를 하기도 전이다.
다른 사회보험들은 사정이 더 나쁘다. 갈수록 적자폭 확대가 불가피한 공무원ᆞ군인연금에 대해 개혁의 ‘개’자도 꺼낸 적 없는 건 그렇다 치자. ‘문재인 케어’는 건강보험의 고갈 시기를 불과 5년 뒤로 앞당겼다. 지금 보장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을 쏟아부어야 할 것은 훗날에도 지속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일 아니겠는가.
그런 정부가 돈을 쓰는 데는 꽤 적극적이다. 10일 밤 국회에서 통과된 내년도 예산 규모는 512조3,000억원이다. 60조원의 빚(국채)을 내야 한다. 나랏빚을 얘기할 때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중요시하는 건, 경제 규모에 비해 감당할 수준의 빚을 지고 있는지 따져볼 수 있어서다. 그간의 불문율은 40%가 마지노선이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야당 대표이던 2015년 9월 “박근혜 정부 3년 만에 나라 곳간이 바닥나 GDP 대비 40%에 달하는 국가채무를 국민과 다음 정부에 떠넘기게 됐다”고 따져 물었다. 지금 정부와 여당은 “40%가 뭣이 중허냐”고 입을 모은다. 이대로면 불과 8년 뒤 국가채무비율은 56.7%까지 치솟는다.
흔히 ‘진보=확장 재정’ ‘보수=긴축 재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정권을 잡으면 진영 논리와 무관하게 대체로 돈 푸는데 적극적이다. 정권의 성패를 가를 중요한 잣대 중 하나가 경제이고, 경기를 끌어올릴 가장 손 쉬운 방법이 현금 살포이기 때문이다. 녹색성장(이명박 정부)이니 창조경제(박근혜 정부)니, 소득주도성장(문재인 정부)이니 거창한 성장 담론들이 먹히지 않으면 돈을 풀어 성장률을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쓴다. 야당일 때와 여당일 때 입장이 180도 달라지고, 주도권을 쥔 쪽은 주로 여당이니 정부마다 그렇게 빚은 늘어난다. 실제 박근혜 정부 4년간 늘어난 나랏빚이 184조원으로 노무현 정부 5년(165조원)보다 많다.
보수 야당도 겉으로는 악악대며 확장 재정에 반기를 들지만, 속으로는 제 잇속 챙기기에만 급급하다. 복지예산을 줄여 자신들의 지역구 예산을 늘릴 뿐이다.
물론 경기가 위축될 때는 돈을 풀어야 하고, 경기가 좋을 때는 씀씀이를 줄여야 한다. 그게 재정의 올바른 역할이다. 하지만 적게 거둬서 많이 쓰는 마법은 현실에는 없다. 씀씀이를 늘리려면 세금을 많이 거두든 보험료를 올리든 구조개혁이 병행돼야 한다. 지금의 정부ᆞ여당이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를 매몰차게 몰아붙였던 것도 같은 논리 아니었나.
비어가는 곳간은 언젠가 모두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말로만 청년, 청년 외칠 게 아니다. 그들의 미래가 현 세대에 담보 잡히지 않도록 누군가는 손에 피를 묻혀야 하지 않겠는가.
이영태 디지털콘텐츠국장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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