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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만원으로 76조 그룹 키운 ‘세계경영 신화’… 외환위기에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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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만원으로 76조 그룹 키운 ‘세계경영 신화’… 외환위기에 몰락

입력
2019.12.10 17:23
수정
2019.12.10 22:42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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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때 섬유업체 대우실업 창업

트리코트 수출로 성공가도 올라

70년대 들어 공격적 사업 확장

20년도 안돼 재계 4위 그룹 성장

외환위기 때 부도 내고 해외도피

18조원 육박 추징금 그대로 남아

고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의 생전 모습.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고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의 생전 모습.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한강의 기적’에 비견됐다. 한국의 고속 성장과 궤를 같이 했던 그의 삶은 그랬다. 만 30세에 창업한 업체를 국내 대기업으로 키워낸 업적은 ‘샐러리맨의 신화’에 가까웠다. 지난 9일 향년 83세로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파란만장한 인생이다. 하지만 성장의 달콤함을 일군 공격적인 사업 확장은 국가부도 상황까지 몰렸던 외환위기 앞에선 무기력했다. 수많은 재벌 기업들이 해체 수순을 밟았고 국가 경제도 흔들렸다. 한때 국내 재계 2위 그룹의 총수까지 올랐던 김 전 회장 역시 역대 최대 규모의 부도를 낸 이후, 해외도피 생활로 굴곡진 일생을 보내야만 했다.

창업 20년도 안 돼 재계 4위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김 전 회장은 1966년 섬유회사인 한성실업에서 일하다가 만 30세인 1967년,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세웠다. 당시 몸에 착 붙는 원단인 트리코트를 만드는 섬유업체 대도섬유의 도재환 씨가 공동 창업자로 동참했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실업은 첫해부터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 수출로, 58만 달러 규모의 실적을 올렸다. 이어 인도네시아와 미국 등으로 시장 확대에 나서면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1968년엔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도 세웠다. 트리코트 원단과 와이셔츠 수출로 큰 성과를 낸 고인에겐 ‘트리코트 김’이란 별명이 따라 붙었다.

1970년대 들어 김 전 회장은 공격적인 인수와 함께 기업 규모 확대에 올인했다. 대우증권의 전신인 동양증권 등을 인수하고 대우건설과 대우중공업 등을 설립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 확장에 나섰다. 1973년 인수한 영진토건을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김 전 회장은 전자 분야에도 손을 뻗쳤다. 그는 1974년 전자제품 무역 계열사였던 대우전자를 1983년 인수한 대한전선 가전사업부 등과 합치고 경쟁사인 삼성전자와 현 LG전자(옛 금성사)에 버금가는 국내 가전 ‘빅3’로 키웠다. 김 전 회장의 몸집 불리기는 계속됐다. 1976년엔 대한조선공사의 옥포조선소를 넘겨받고 대우조선공업을 출범시켰다. 이어 1978년엔 새한자동차를 인수해 자동차 사업에도 진출했다.

김 전 회장의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은 당시 정부가 추진했던 1960년대 수출 진흥 정책,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과 찰떡궁합이었다. 1972년 국내기업 수출 5위를 기록했던 대우는 설립된 지 20년도 안 돼 삼성, 현대, LG에 이어 재계 4위 대기업 집단으로 성장했다.

2013년 3월 22일 열린 대우그룹 창립 46주년 기념식에서 취재진 질문을 받는 김우중 전 회장. 연합뉴스
2013년 3월 22일 열린 대우그룹 창립 46주년 기념식에서 취재진 질문을 받는 김우중 전 회장. 연합뉴스

공격적 사업방식이 ‘부메랑’

대우그룹은 1990년대 전성기를 달렸다. “기술이 없으면 사오면 된다”, “사업은 빌린 돈으로 하고 벌어서 갚으면 된다” 등 공격적인 경영방식도 여기에 한 몫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로 유명한 1993년 ‘세계경영’ 선언 이후 개발도상국과 동유럽 국가에 적극 진출했다. 대우그룹은 1998년 이미 자동차와 중공업, 조선, 전자, 통신, 금융, 호텔 등 다방면에서 41개 계열사를 거느렸다. 이때 대우가 고용한 인력은 국내에서 10만명, 해외에서 25만명에 달했다. 자산총액은 재계 2위에 해당하는 76조7,000억원. 1998년 한국의 수출총액 1,323억 달러 중 약 14%가 대우가 수출한 금액(186억 달러)으로 충당됐다.

하지만 위기가 불어 닥치자 달콤한 과실을 안겨줬던 공격적 사업 확대방식은 오히려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금리가 연 30% 가까이 치솟자 차입경영을 해왔던 대우의 이자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국내 대기업의 연쇄부도로 금융권이 대출금 회수를 서두르고, 대우차와 제네럴모터스(GM) 간의 합작 추진이 흔들리면서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지자 대우그룹의 유동성 위기는 현실이 됐다. 당시 부채 규모만 89조원에 달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국민 세금 30조원이 투입됐다.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하며 반전을 꿈꿨지만, 끝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기업재무개선작업(워크아웃) 대상에 오르면서 해체됐다.

2017년 3월 22일 서울 힐튼 호텔에서 열린 대우그룹 창업 50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인사말을 마친 뒤 연단에서 내려오는 김 전 회장 모습. 연합뉴스
2017년 3월 22일 서울 힐튼 호텔에서 열린 대우그룹 창업 50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인사말을 마친 뒤 연단에서 내려오는 김 전 회장 모습. 연합뉴스

“더 많은 젊은이가 세계를 누비길”

김 전 회장의 오랜 해외 생활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1999년 10월 중국 산둥성의 옌타이 자동차부품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뒤 귀국하지 않고 해외를 떠돌았다. 41조원의 분식회계를 지시하고 이를 통해 10조원에 가까운 사기대출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내에 설 자리를 잃었다. 2005년 귀국한 뒤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개월과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000억원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2008년 1월 특별 사면됐다. 하지만 18조원에 가까운 추징금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검찰에선 분식회계 사건 당시 공범으로 연대책임을 지는 전직 대우그룹 임원들을 상대로 추징금 집행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회장은 또 35억원대의 지방세 미납으로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서울시의 고액 상습 체납자 명단에도 포함됐다.

김 전 회장은 해외에 머물면서도 재기를 꿈꿨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자신이 시장을 개척한 ‘제2의 고향’ 베트남에 체류하면서 동남아시아에서 인재양성 사업인 ‘글로벌 청년 사업가(GYBM)’ 프로그램에 주력했다. 2014년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쓴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선 대우그룹의 해체가 경제 관료들의 정치적 판단 오류 때문에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된 이후에도 대우그룹 공채였던 ‘대우맨’들은 해마다 창립기념일인 3월22일 기념행사를 열어왔다. 김 전 회장은 50주년(2017년)과 51주년(2018년) 행사에 참석했다. 지난해 열린 51주년 기념식이 김 전 회장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공식 석상이다. 그는 지난해 28년 만에 개정 출판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서문에서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더 많은 젊은이들이 세계를 누비며 우리 세대보다 더 큰 꿈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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