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2013년 3월 22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AW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대우그룹 창립 46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9일 향년 83세로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한때 제계 2위 그룹의 총수로 세계 곳곳을 누비는 한국의 기업인을 대표했다. 하지만 역대 최대 규모의 부도를 내고 해외 도피 생활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기도 했다.

김우중 전 회장은 1936년 대구에서 김용하와 전인항씨 사이의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가 납북되자 15세부터 홀어머니 아래서 소년가장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도맡았다. 휴전 후 상경해 경기중ㆍ고등학교를 거쳐 1956년 연세대 경제학과에 입학, 1960년 25세에 졸업했다.

청년 김우중의 세계경영 신화는 훗날 대우그룹의 모태가 된 대우실업 창업과 함께 시작됐다. 1966년까지 섬유 수출업체 한성실업 무역부장으로 근무하던 김우중은 자본금 500만원으로 30세가 되던 1967년 트리코트 원단 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 씨와 손잡고 서울 충무로에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대우는 대도섬유의 대와 김우중의 우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창업 첫해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팔아 58만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렸다. 이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둔다. 당시 트리코트 원단과 와이셔츠 수출로 대우그룹 구축의 종잣돈을 마련한 그에게 ‘트리코트 김’이란 별칭이 붙기도 했다.

또 직접 샘플 원단을 들고 대우의 첫 브랜드인 영타이거를 알리면서 동남아시아에서는 ‘타이거 킴’으로 불렸다.

이 같은 수출 성과로 대우실업은 승승장구했다. 1968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호주 시드니에 해외 지사를 세우는 등 1975년 한국의 종합상사 시대의 문을 연 것도 김 전 회장의 대우실업이었다.

김우중의 대우그룹은 왕성한 기업 사냥을 통한 다계열, 다업종 확장 방식으로 급성장을 거듭한다. 대우그룹의 모기업 격인 ㈜대우는 1973년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 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출범시킨 회사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인수합병과 업종변경 등의 과정을 거쳐 김 전 회장은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조선 등을 설립했다.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고,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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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시장 진출도 활발하게 시도했다.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에까지 진출, 해외 사업의 터를 닦은 것도 이 때였다.

1974년 1억불 수출탑을 달성하는 데 성공하며 신흥 재벌 반열에 올랐고, 창업 15년 만에 대우는 자산 규모 국내 4대 재벌로 성장했다. 그리고 김 전 회장은 1981년 마침내 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김 전 회장은 특히 금융과 해외영업에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며 박정희 정권의 압축ㆍ고속성장 과정에 가장 두드러진 기업인으로 주목 받았다. 1970년대 무섭게 입지를 넓힌 그는 1980년대 중반 한때 대우조선 경영악화와 노동쟁의 등 난관에 부딪히며 부도설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1980~90년대 내내 세계경영을 화두로 성장일변도 전략을 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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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90년대 들어 과거 사회주의권 국가였던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그 결과 1993년 말 185곳이던 해외 네트워크가 1998년 말에는 396개(현지법인 포함 시 589곳)로 늘어났고, 해외고용 인력도 2만2,000명에서 15만2,000명으로 급증했다. 당시 고인은 연간 해외 체류기간이 280일을 넘기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펴낸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지금도 회자되는 역대급 베스트셀러가 됐다. 1992년엔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압박에 불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1996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위기를 잘 넘기며 1998년엔 대우그룹을 재계 2위까지 끌어올렸다.

김 전 회장은 차근차근 이익을 따지는 장사꾼이라기보다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먼저 도전하는 ‘황무지 개척자’란 평가를 받는다. 일생에 걸친 도전과 성공 과정에서 그는 숱한 일화를 남겼다. 세계경영이 한창이던 당시 연간 280일을 해외에 체류하던 그를 카리모프 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몽골제국의 칭기즈칸에 비유해 ‘킴기즈칸’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부도 위기에 처한 김 전 회장 의 구명을 요청하기도 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2014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대우특별포럼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고인은 기발한 착상으로 신시장을 개척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1970년대 중반 정주영 회장의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진출한 데 자극 받은 김 전 회장은 ‘남들이 안 가는’ 아프리카의 탄자니아를 택했다. 당시 한국과 미수교국이었던 탄자니아의 누메이리 대통령이 외국 정상 초청을 위한 영빈관을 짓고 싶어 하는 걸 안 그는 영빈관을 지어주겠다며 대신 탄자니아에 넘치는 면화를 공사대금으로 달라고 해 계약을 성사시켰다. 뭐든 팔 자신이 있던 그에게 면화는 곧 돈이었고 이를 계기로 탄자니아와 한국은 수교까지 맺게 된다. 비슷한 방식으로 대우는 리비아에서 도로, 주택, 비행장을 지어주고 대금으로 석유를 받기도 했다.

김 전 회장과 대우그룹에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이었다. 1998년 대우차-제너널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 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 제한 조치까지 내려지면서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일본계 증권사의 ‘대우그룹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 등도 대우의 몰락에 기름을 부었다.

부채비율 400%를 넘던 대우그룹은 결국 1999년 8월, 당시 남아 있던 25개 회사 중 12개의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사실상의 그룹 해체였다. 그 해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효과는 없었다. 결국 11월 1일 김 전 회장은 13명의 대우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경영포기 및 회장직 사퇴를 선언했다.

'대우 사태'가 발생한 1999년 10월 중국으로 출국했다가 종적을 감춘 뒤 해외에 체류했던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2005년 6월 14일 하노이발 아시아나항공 OZ734편으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 배포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사죄의 글' 연합뉴스

이후 검찰 수사를 피하기 위해 출국해 5년 8개월 간의 해외 도피생활을 하던 김 전 회장은 2005년 6월 입국해 검찰 조사를 받았다. 2006년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 등 혐의로 징역 8년 6개월, 추징금 17조9,253억원이 확정됐고, 2008년 1월 대통령 특사로 사면 받았다.

고인은 2014년 8월 대우그룹 해체 15주년을 맞아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남겼다. 책에는 대우그룹 해체가 경제관료의 정치적 판단 오류 때문이라는 ‘기획 해체론’이 담겨 이목을 끌었다.

남상욱 기자 thot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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