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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영국에서는 나이 얘기를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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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영국에서는 나이 얘기를 하지 않는다

입력
2019.12.09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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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have to keep going to keep going.(계속하려면 계속해야 한다.)”

돌아가신 스텔라의 고모 말씀이다. 93세의 할머니가 새 차를 샀다. 반짝반짝한 새 차가 아니라, 타던 차보다 더 나은 중고차를 새로 샀다는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93세에! 운전을 좋아했던 그는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고속도로 운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픈 노인들을 싣고 병원과 미용실로 그들의 발 노릇을 했으며 여왕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선행을 알리려는 신문기자와의 만남을 거부한 건 나이가 알려지면 아무도 자신의 차를 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스텔라가 덧붙인다. “한 번 멈추면 다시 시작하기 어렵다. 무엇이든 그만두지 말고 계속해라. ‘은퇴하면 여행을 갈 거다.’ ‘시간이 나면 이걸 하고 저걸 할 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여행도 못 가고 하겠다는 것도 못한다. 지금 해야 할 수 있고, 지금 하지 않으면 못한다. 하던 일은 나이가 들어서도 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 하지 않던 일을 새로 시작하기는 어렵다.”고.

그는 내게 영국을 보여주고 영국을 말해준다. 70세면 한국에서는 노인 같은데, 영국에서는 도무지 노인 같지가 않다. 단발머리에 짧고 화려한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그렇고, 두 시간 이상의 운전도 마다하지 않는 에너지도 그렇다. 내 질문 덕분에 생각해보지 않은 것을 생각하게 되어서 좋다고 하고, 바쁘다고 안 갔으면 미처 몰랐을 곳을 가게 되어서 좋다고도 한다. 나는 영국의 아름다운 전원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뻔하지 않고 다른 삶을 알게 되어 참 좋다.

“You don’t stop having fun when you get old. You get old when you stop having fun! (늙었다고 재미있게 놀기를 멈추면 안 된다. 재미있게 놀기를 멈출 때야말로 늙은 거다.)”

영국은 노는 것도 멈추지 말라고 한다. 남의 나라의 월드컵 결승 날, 바비큐 파티를 열어 제 나라 경기마냥 즐긴다. 스텔라는 노랑 카디건과 빨강 미니스커트를 입고, 빨강 가발까지 썼다. 독일과 아르헨티나의 국기 색깔로 정원을 장식하고, 두 나라의 소시지와 맥주를 준비하고, 테이블 위에는 축구공이 그려진 냅킨을 깔았다. 다 함께 웃고, 소리치고, 떠들고, 먹고, 마셨다. 바깥주인 하워드는 “스테이크는 어떻게 구워줄까?” 일일이 묻더니만, “결국은 다 똑같다”며 모두를 웃긴다. 경기 후에는 축구공처럼 생긴 축구공 크기의 초콜릿에 ‘독일 1대 0’이라고 써서 승리를 축하하고, 내게는 가장 멀리서 온 손님이라며 트로피까지 줬다.

파티를 여는 이유가 ‘내게 영감을 줄 사람을 소개하는 것’도 된다. 깊게 파인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노마가 86세라서 놀랐는데, 지금도 풀타임으로 일하는 미용사라니 또 놀란다. “I don’t advertise my age.” 나이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그냥 하던 것을 계속할 것’과 ‘늘 관심을 잃지 말 것’을 가르쳐준다. 긴 금발머리에 어깨가 드러난 티셔츠를 입은 캐롤린도 나이를 짐작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68세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것도 놀라운데,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편과 100여 마리의 동물들까지 돌본다는 말에는 입이 딱 벌어진다.

스텔라와 자주 만나는 90세의 할머니는 ‘늙어서도 건강해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뒤엎는다. “몸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라며 ‘애티튜드’를 강조한다. 따라나선 단체 나들이에서 모두가 긴 산책을 하는 동안, 혼자 버스에 남아 기다리는 피해자 신세를 마다하고 자기만의 계획을 만들어 근사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국에 사는 내가 아는 영국 할머니는 “건강이 최고에요”와 “건강하세요”라는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건강은 챙기면서 “건강하면 무얼 할 건데?”는 챙기지 않는다면서.

한국에서는 언제나 ‘나이’가 떠오르고 ‘이 나이에’와 ‘나이에 맞게’가 튀어나오는데, 영국에서는 도대체 나이 얘기를 꺼낼 수가 없다. 나이 얘기를 하지 않으니 나이가 중요하지 않은 게다. 나이 든 사람을 만나도 젊은 사람을 만날 때와 다르지 않다. 어른 대접을 하며 가만히 듣기만 하는 게 아니므로 어렵지 않고 편하다. 어른이 움직일 때마다 발딱발딱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다리를 꼬고 앉아도 되니 동등한 느낌마저 든다. 해보지 않은 경험과 살아보지 않은 삶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라 흥미롭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생각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매일 하고 있는 일이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닐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계속한다는 것은 나만의 생활방식을 만드는 일이다.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그토록 원했던 것을 실천하는 것도 좋지만,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일을 계속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쩌면 노화는 나이보다 의지의 문제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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