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 무역체제의 안정성을 이끌어 온 세계무역기구(WTO)가 25년 역사상 유례 없는 위기를 맞았다. 상소기구(Appellate BodyㆍAB)가 미국의 후임자 선정 반대로 정원을 채우지 못하면서 11일부터 무역분쟁의 최종심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역분야에서 미국의 고립주의에 따른 국가별 각자도생 분위기가 심화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라 무역 의존도가 높고 WTO 제소를 분쟁 해결 방식으로 적극 활용해 온 한국에게는 큰 악재가 될 수 있다.
8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에 따르면 11일부터 정원이 7명인 WTO 상소위원은 중국 출신 1명만 남게 되면서 WTO의 기능 상실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위원 3명이 1건을 심리하는 AB의 운영상 최종심 재판부 구성이 아예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미해결된 무역분쟁 제소 건의 해결이 지연되고 처벌도 미뤄지면서 각국이 너나 할 것 없이 고율관세를 부과하는 등 WTO 규정 위반 사례가 흔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필 호건 유럽연합(EU) 무역담당 집행위원은 “WTO의 규칙이 국제무역에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면 우리는 ‘정글의 법칙’만 갖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WTO의 분쟁 절차에 관해서는 그간 찬반 의견이 분분했다. 강대국 중심의 세계 교역 구도에 법의 지배 질서를 적용케 한 공로에 열광하는 이들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단 7명으로 구성된 AB의 지나친 통제력을 비판해왔다.
특히 미국은 오래 전부터 AB를 사법적 과잉 대응이라고 판단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임기가 끝나는 상소위원 재임에 반대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WTO 무력화 위협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보호무역주의를 주장하며 백악관에 입성한 이후 본격화됐다. WTO 본부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 주재 미국대표부의 드니스 시어 대사는 6일 “AB의 기능에 관한 미국의 오랜 우려는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EU를 비롯한 WTO 회원국들은 AB를 대체할 별도의 자체 항소 절차 마련 등을 논의하고 있다. 경제대국의 일방적인 무역정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이 퇴임하는 2021년이나 2025년 이후에는 AB가 재건될 것으로 기대하는 기류도 적지 않다고 NYT는 분석했다.
한국도 WTO 상소기구 기능 상실 문제의 직접적인 이해당사국이다. 한국은 무역 상대국을 다양화하는 과정에서 생긴 분쟁 해결을 위해 WTO의 분쟁 해결 절차를 적극 활용해왔다. 당장 한일 갈등과 관련해서만 보더라도 지난 9월 일본의 일방적인 수출규제 조치를 WTO에 제소한 바 있다.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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