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이충재 칼럼] 대통령이 ‘모르는’ 민정수석실

입력
2019.12.09 18:00
수정
2019.12.09 18:09
30면
0 0

박정희 3선개헌 위해 설치된 靑 민정수석실

유재수와 ‘하명수사’ 의혹으로 민낯 드러나

문 대통령, “권력 절반만 쓰라”는 말 유념하길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청와대에서 예방한 록밴드인 'U2'의 보컬이자 사회운동가 보노를 접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청와대에서 예방한 록밴드인 'U2'의 보컬이자 사회운동가 보노를 접견하고 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태동 배경은 그리 떳떳하지 않다. 1969년 박정희 정부가 3선 개헌을 밀어붙이려고 처음 만들었고, 이후 잠시 폐지됐다가 유신체제 때 다시 살아났다. 권력 장악과 통제라는 정당하지 못한 기능에도 불구하고 이 기관이 심지어 진보 정부에서도 명맥을 유지한 것은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민정수석실의 막강한 힘의 원천은 사정기구의 장악에 있다. 검찰과 경찰, 국정원, 감사원, 국세청 등 5대 권력기관의 통할이 합법적으로 부여된 권한이다. 국가 권력 기구의 심장인 동시에 ‘권력 위의 권력’인 셈이다.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 여기에 문제가 있다.

유재수 ‘감찰 무마’ 의혹과 울산시장 ‘하명 수사’ 의혹은 그동안 가려져 있던 민정수석실의 맨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유 전 부시장 비리는 민정수석실 감찰을 통해 밝혀졌으나 그는 징계를 받기는커녕 영전을 거듭했다. 그가 구속된 사유만 봐도 이런 과정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가 드러난다. 문재인 대통령을 “재인이 형”이라고 부를 정도의 위세와 무관하다고 볼 수 있을까. 추상같아야 할 감찰권의 사유화나 다름없다.

울산시장 ‘하명 수사’ 의혹은 거꾸로 권한을 자의적으로 남용한 사례다. 자기편 후보로부터 경쟁자 비리 첩보를 받아 수사에 활용토록 했다면 권위주의 시기의 ‘정치 공작’과 다를 바 없다. 민정수석실의 주요 기능인 사정과 정보, 여론, 민심 관련 업무가 명확히 규정되지 않다 보니 언제든지 월권이 가능한 구조다.

그러니 감찰반원들이 ‘고래고기 탐문’차 울산에 갔다고 해도 국민들이 믿지 않는 것이다. 부처 간 갈등 조정하라고 만든 기구가 총리실 내 국무조정실 아닌가. 지난해 말 김태우 수사관의 폭로도 ‘합법적 정보 수집’과 ‘민간인 사찰’ 사이의 모호함이 발단이다. 이대로라면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선 위험한 줄타기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현 정부 들어 민정수석실 문제가 연이어 불거지는 데는 ‘강한 청와대’ 기조 영향이 크다. 문 대통령은 처음부터 청와대가 중심이 되는 정부 운영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청와대 비서실 인원과 예산이 역대 정부에서 가장 많다. ‘촛불 혁명’이 던진 과제를 신속히 수행하려는 조바심에서 그런 것이겠지만 ‘청와대 정부’의 부작용은 그 이상으로 심각하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정보를 손에 쥐려는 민정수석실의 촉수는 끝도 없이 뻗어간다. 대통령의 눈과 귀 역할 이전에 거대 ‘부패 기관’으로 변질될 소지를 안고 있다.

권력의 위험은 중독성에 있다. 진보는 권력을 활용할 줄 모르고 보수는 권력을 자제할 줄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진보나 보수나 권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은 똑같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정보ㆍ감찰 기관의 불법 정보 수집은 막겠다고 약속했다. 취임 직후엔 국정원의 국내 정보 수집 기능도 없앴다. 그런데 민정수석실의 권한은 아메바처럼 무한 증식하고 있다. 그 확대된 권력을 지금 청와대 내 실세들이 향유하고 있다는 것을 문 대통령은 모르는 듯하다. 따지고 보면 이번의 사달도 ‘친문’들의 권력 나눠 먹기에 균열이 생긴 데서 비롯됐다.

한국 정치에서 누구보다 오래 권력을 누렸던 김종필 전 총리는 “권력을 50%만 써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권력을 온전히 쓰면 너무 위험하고 당사자도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절반 정도만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다. 노회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정치 9단’의 말인지라 귀담아 들을만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강한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권력의 크기가 아니라 권력을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공권력에 의존하는 정치가 아니라 대화와 타협, 그리고 설득력에 기반한 정치가 그를 ‘미국 역사상 가장 강한 대통령’으로 만든 요인이었다.

어떤 권력자든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고 비전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삼으려면 권력을 지혜롭게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은 다른 사람을 베고, 결국은 자신까지 베고 만다.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