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디자인 브랜드 아르텍이 2013년 선보인 ‘화이트 컬렉션’. 빌레 코코넨이 디자인한 우울증 완화에 도움이 되는 ‘밝은 빛 치료 램프’ 등이 포함돼 있다. 빌레 코코넨 제공

현대 디자인에서 조명의 비중은 비약적으로 커졌다. 공간을 밝히고, 장식적인 효과를 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생체리듬을 조절해 주고 우울증 치료에도, 말 그대로 빛을 발한다. 밤거리를 밝히는 용도에 불과했던 가로등이 범죄를 예방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남의 나라 얘기만도 아니다. 서울시도 2012년부터 어둡고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빛을 이용해 안전문구를 투사하거나(여성안심귀갓길 사업), 공공시설에 센서등(생활안심디자인 사업)을 부착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진행된 ‘제18회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빌레 코코넨이 강연을 하고 있다. 서울디자인페스티벌 제공

그렇다면 일조량 부족으로 일찌감치 조명 디자인이 발달한 북유럽은 어떻게 할까. 빌레 코코넨(44) 핀란드 알토대학 건축학부 교수를 최근 서울 삼성동에서 열린 ‘제18회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만났다.

코코넨은 핀란드 디자인 브랜드 아르텍에서 2005년부터 2014년까지 디자인 디렉터를 맡았다. 노키아, 이딸라, 바르질라 등 다양한 기업들과 광범위한 협업을 해 온 핀란드의 대표적 산업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가 들려준 조명 디자인 이야기는 북유럽 디자인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을 깬다.

우선 그는 자연친화적인, 환경적인 디자인보다 과학기술 그 자체를 신봉한다. 코코넨은 “디자인은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라며 “그러려면 과학, 의학, 정보통신 등 여러 분야의 지식을 깊이 있게 받아들이고, 이를 접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자이너는 예술가가 아니라 과학자라는 얘기다.

대표적인 예가 2009년 코코넨이 발표한 ‘밝은 빛 치료 램프’이다. 2년간 고대 건축물 벽의 두께와 구석의 각도 등을 연구했다. 조명이 없던 시절, 자연광을 어떻게 실내 깊숙이 끌어들일까 고민했던 조상의 지혜를 빌려 왔다. 이는 조도(단위 면적당 주어지는 빛의 양)를 일반 조명에 비해 10배 이상 높이면서도, 간접조명을 통해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도록 하는 방법에 적용됐다.

이를 통해 일주일에 3~5번, 1회당 최대 2시간씩 이 조명을 쬐면 우울증이 줄어든다는 의학적 인증까지 받아냈다. 물론 치료 램프를 흰 박스 모양으로 만들어 디자인적으로도 손색없게 했다. 코코넨은 “겨울에 햇빛이 부족한 북유럽 사람들은 우울증 치료를 위해 의료기기를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의료기기다 보니 아무래도 여러 번거로움이 많아서 일상 생활용품으로 바꾸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빌레 코코넨이 디자인한 엔스토사의 ‘옥외 가로등’. 높이가 3m인 가로등 내부는 다각도의 센서가 부착돼 있어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해 필요한 곳에 빛을 비춘다. 빌레 코코넨 제공

헬싱키 곳곳에 설치된 납작한 머리 모양의 가로등(2016년)도 그의 작품이다. 기존 가로등이 빛이 떨어지는 곳만 밝혔다면 그가 개발한 가로등은 센서 기술을 활용해 구석구석으로까지 빛이 퍼진다. 이 가로등에 5G(5세대 이동통신) 안테나를 부착해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기후에 따라 빛을 조절할 수도 있다. 이 밖에 그가 지난해 개발한 태양열 이동식 파라솔은 캠핑 등 전기가 없는 곳에서 야외활동을 할 때 요긴한 에너지 생산장치다. 이동성을 고려해 초경량 탄소섬유를 활용해 지지대를 만들었다.

지난해 빌레 코코넨이 복합기술회사인 엑셀과 협업해 개발한 ‘태양열 이동식 파라솔’. 빌레 코코넨 제공

북유럽 하면 떠올리는 미니멀리즘도 코코넨은 부정했다. 그는 “미니멀리즘은 디자인 측면에서 나온 게 아니라 핀란드의 전면적인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자원이 부족하고 기후가 나쁜 탓에 집 안에서 웬만한 것들을 해결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불필요한 것은 없애고 실용적인 것만 남길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고도의 미감이라기보다 어쩌다 보니 미니멀리즘이 됐다는 설명이다.

코코넨은 또 앞으로는 빛을 끌어내는 것보다 막아내는 조명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코코넨은 “과거에는 빛이 부족해서 조명이 중요했지만, 요즘에는 휴대폰과 전자기기, 도시 풍경 등 빛 공해가 심각하다”라며 “이를 조절해서 삶의 균형을 찾아주는 조명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달 21일부터 코코넨이 기획에 참여한 핀란드 디자인 전시 ‘인간, 물질 그리고 변형-핀란드 디자인 1만년’이 헬싱키에 이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석기시대 농기구와 각종 도구들, 바이킹 등에서 어떻게 현재의 핀란드 디자인이 탄생하게 됐는지를 훑을 수 있을 것”이라 귀띔했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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