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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통의 경제성장률 지표인 국내총생산(GDP)은 인터넷, 테플론, 레이더, 컴퓨터 등과 마찬가지로 2차대전의 산물이다. 전쟁 이전 국부(國富)를 측정하는 방법은 나라의 총생산물 가운데 민간 영역에서 소비할 수 있는 물량을 집계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정부 지출은 민간이 누릴 몫을 가져다 쓰는 국부 잠식 요인이었다. 국제전에 가담해 막대한 전비를 필요로 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난감한 일이었고, 이는 정부를 ‘소비자’ 반열에 올려 모든 정부 지출을 국가 총생산액에 포함시키는 GDP 개념을 ‘발명’하게 했다.
러시아 출신 미국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는 이보다 앞서 국민소득 통계를 정초한 인사다(그의 197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도 이 업적에 따른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1933년 취임하자마자 대공황 충격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자국 경제의 현실을 좀 더 분명히 파악하고자 전국경제조사국(NBER)에 국민소득 추계 자료를 요청했는데, 이 작업을 주도한 이가 쿠즈네츠였다. 이듬해 의회에 제출된 쿠즈네츠 보고서는 미국 국민소득이 대공황기(1929~32년)를 거치며 절반이나 줄었다는 충격적 사실을 보여줬다. 불황에도 불티나게 팔린 이 보고서가 루스벨트 정부의 뉴딜정책 추진에 막강한 동력이 된 건 물론이다.
쿠즈네츠는 자신의 과업이 국가 경제의 산출량을 넘어 ‘후생’까지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거라 여겼다. 그는 1937년 의회에 제출한 정식 국민소득 통계 보고서에 ‘군비 지출, 광고비, 금융 및 투기 거래, 비싼 지하철ㆍ주거 비용’ 등을 지목하며 “사회에 이로움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줄이는 요소를 제거한 국민소득 추계값을 산출하는 것은 대단한 값진 일”이라며 나아갈 바를 천명했다. 그러나 곧 세계대전이 터졌고, 쿠즈네츠의 고상한 의지는 전시에 눈덩이처럼 불어날 재정지출을 경제성장과 결부하고 싶었던 상무부 관료들에 의해 꺾였다(이상 다이앤 코일 ‘GDP 사용설명서’ 참조). 국민소득 측정의 기본 틀이 GDP로 전환된 배경엔 이러한 정치적 투쟁이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후 GDP는 국민 경제의 대표적 성과 지표이자 공공 정책 설계의 핵심 도구가 됐다. ‘현대 경제학의 대부’로 불린 폴 새뮤얼슨은 “GDP를 비롯한 국민소득계정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상찬했을 정도다. 그러나 80년 전 쿠즈네츠의 좌절은 고스란히 GDP의 약점이 됐다. 그 압도적이고 견고한 수치들의 성채에 사람들의 삶의 질이나 행복도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다는 것이 대표적 비판이다. 한마디로 “경제는 성장한다는데 사람들의 생활은 왜 더 어려워지나”라는 즉물적 질문 앞에서 GDP는 답변이 궁하다는 것이다.
이는 보다 구체적 차원의 문제 제기로 이어진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재임기의 프랑스 정부가 대안적 경제 성과 측정 방식을 모색하고자 꾸린 국제위원회의 보고서(2010)를 보면 경제 상황 변화에 가장 민감한 주체는 가계인데도 현행 GDP 체계는 가계 중심적 관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생산 지표를 소득 및 소비 지표보다 우선시하는 관행이 대표적이다. 상품ㆍ자본 교역, 생산자-소비자 가격 차이 등의 변수 때문에 생산이 늘어도 가계소득은 되레 줄어드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보건ㆍ복지 등 공공서비스를 계량하는 방법이 제대로 수립되지 않아 수혜 가구의 가처분소득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점도 문제다. 보고서는 집안일이나 여가 선용 등 가계가 스스로를 위해 ‘생산’하는 서비스들도 소득이나 생산 지표로 인정할 것을 제안한다. 같은 월급을 받는다고 해서, 정시 퇴근해 가사분담과 휴식에 시간을 할애하는 직장인과 야근을 밥먹듯 하는 직장인의 ‘소득’을 지금처럼 같은 수치로 반영하긴 어려운 노릇이란 얘기다.
행여 올해 성장률이 10년 만에 2%에 못 미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GDP 통계를 주시하고 있다가 문득 이런 내용들이 눈에 들어와 적어봤다.
이훈성 경제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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