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스탠드업 코미디 크루 ‘블러디 퍼니’
마이크 하나로 좌중을 사로잡는 스탠드업 코미디. 국내 한동안 명맥이 끊겼던 스탠드업 코미디가 최근 다시 각광받으면서 이 공연만 전문으로 선보이는 모임이 결성됐다. 전원 여성으로만 이뤄진 ‘블러디 퍼니’로 7일 서울 용산구 펀타스틱씨어터에서 첫 정기공연을 열고 두 달에 한번씩 관객과 만난다. 지난 28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블러디 퍼니 멤버들은 “스탠드업 코미디는 기본적으로 혼자 무대에 서는 공연이지만, 혼자서는 이 판을 키울 수 없다. 개개인의 목소리를 합칠 때 공감도 커질 것”(최정윤)이라고 했다.
서울 홍대와 이태원 일대에서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멤버들의 경력은 화려하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최정윤(34)씨는 유학시절 교포 코미디언 마가렛 초우의 공연을 보고 스탠드업 코미디의 매력에 빠졌다. “아시아 여성이 욕과 성적인 농담을 섞어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극장이 뒤집어지는 걸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다. 저도 제 안에 이야기가 많은데, 돈 못 벌어도 이걸 재밌게 전달하는 무대에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최씨는 뉴욕으로 가서 20년차 희극배우에게 스탠드업코미디를 배웠고, 스탠드업 코미디 개론서 ‘스탠드업나우뉴욕’도 썼다.
지난해 이맘 때 최씨가 홍대와 이태원에 마련된, 신인들을 위한 코미디 무대(일명 ‘오픈 마이크’)에 몇 차례 섰을 때 방송사 개그맨 공채시험에 떨어진 최예나(27)씨를 만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희극 학원을 등록한 최씨는 연기보다 ‘남성문화’를 먼저 배워야 했다고 말했다. “개그 아이템을 짜가면 (강사들이) 다 뜯어 고쳐서 ‘너네(여학생)는 이걸 해야 한다’고 주는 배역이 못 생기거나 예쁜, 외모로만 나눠지는 배역이었다. 방송사 공채 3차 시험에서 떨어지면서 회의감이 들던 찰나에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러 갔다. ‘네 말 틀렸다’ 하는 사람 없이 오롯이 관객하고 소통하는 게 좋았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면서 ‘국내 최초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 크루: 블러디 퍼니’가 결성됐다.
고은별(32)씨는 ‘2년 간 자막 달린 외국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영상’을 보다가 올 1월 블러디 퍼니의 무대를 보고 의기투합했다. “어느 순간 여성이 꽃 아니면 꽃받침대로만 소비되는 한국 코미디를 못 보게 됐다. 불쾌하지 않으면서 웃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다 보니 외국 스탠드업 코미디를 봤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특히 사회적 약자가 자기 약점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게 공감이 가고 재밌더라. 유머라는 무기를 쓰니까 약자들도 말할 기회가 생겼다.”
100여년에 걸친 역사를 통해 웃음의 포인트가 합의된 영어권 국가의 스탠드업 코미디와 달리 국내는 “아직 합의된 선이 없다”는 게 장점이자 가능성이다. 최정윤씨는 “선이 명확하지 않으니까 관객 따라서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어떤 날은 센 얘기를 해도 빵빵 터지고 어떤 때는 갑자기 싸해진다. 그래서 방송에서는 안전한 개그를 많이 한다. 공통된 웃음의 기준이 없다는 사실이 좋을 수도 있다. 새로 만들어 나가면 된다”고 말했다.
이들이 공연 소재를 얻는 건 일상. 구성애 선생의 ‘푸른아우성’에 소속의 청소년 성교육강사로 활동하는 최정윤씨는 자연스럽게 한국의 성문화에 대해, PC방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는 최예나씨는 아르바이트와 희극인 지망생으로 겪은 경험을 들려줄 때가 많다. 고씨는 “저는 공연 소재가 달라져도,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가부장제의 비판이었다. 이번 공연에서는 리얼돌에 대해 들려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혼자 무대 서는 장르 특성상 ‘완전체’로 뭘 하는 법은 없다. 연극 극단처럼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고 싶은 여성은 단원(크루)으로 가입하고, 서로의 공연을 모니터링 하면서 조언을 하고 두 달에 한번 일정 맞는 배우들이 정기 공연 무대에 오른다. 이번 공연에는 세 사람 외에도 경지은(28), 이슬기(37), 김보은씨가 함께 무대에 오른다. 경씨와 김씨는 극단이 블러디 퍼니와 협업을 하면서 배우에서 희극 배우가 된 케이스다. 기획사를 차린 이씨는 이들의 공연을 보고, 매니저를 자처했고 내친김에 무대까지 오르게 됐다.
한 사람 당 10여분씩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공연은 19세 이상이면 술을 가져와 마시면서 볼 수 있다. 수화 동시통역으로 진행돼 듣지 못하는 관객도 즐길 수 있다. 고씨는 “저희 개그가 한국에서 메인 코드는 아니다.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주류의 웃음 코드를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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