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영화를 보는 한 젊은이를 보며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는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장면을 ‘빨리감기’ 속도로 봐서, 스킵하는 장면이 워낙 많아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중요한 장면이나 보고 싶은 장면만 효율적으로 선택해서 보는 것이었다. 참 편리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가 지닌 섬세한 감동의 디테일을 많이 놓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저 장면을 빨리 돌려 버리면 주인공이 그토록 눈물 흘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텐데, 저 장면을 그냥 건너 뛰어 버리면 주인공이 고난을 극복하는 감동적인 과정을 결코 느낄 수 없을 텐데. 내 마음 속에서는 그런 안타까움이 싹텄다. 그 청년이 보고 있는 영화를 영화관에서 한 장면도 빠짐없이 관람한 나로서는 실로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우리 현대인들은 그렇게 모든 것을 빨리, 더 빨리 섭취하려다가 결국 콘텐츠의 소화불량에 걸릴 위험에 처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기나긴 영화나 드라마처럼, 우리 삶에도 지루한 부분, 때로는 건너뛰고 싶은 부분, 삭제하거나 편집해 버리고 싶은 부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조금 더 성숙해진 나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그토록 아파하고, 방황하고, 정체되어 있는 것만 같았던 그 시절의 소중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가장 많이 방황하던 시간, 일이 좀처럼 진행되지 않아 답답하던 그 과정들은 올올이 내 삶의 그림자이자 소중히 껴안아야 할 내 삶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생의 디테일을 한 순간도 남김없이 한올 한올 즐길 줄 아는 것. 지루한 부분도, 서글프고 힘겨운 부분도 남김없이 받아들이는 용기. 그것이 내게는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길, 더 풍요로운 나 자신의 뿌리와 가까워지는 길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예술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비법으로 ‘누워서, 천천히, 전혀 조바심을 가지지 않고 바라보기’를 처방한다. 서양 사람들은 너무 바쁜 나머지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끝없이 섬세한 디테일의 묘사 자체가 감동을 자아내는 이야기의 진가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우리의 판소리도 제대로 완창을 하면 3시간을 훌쩍 넘기는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완창 판소리를 제대로 감상해 본 사람, 오페라나 연극을 단 1분도 놓치지 않고 깊이 있게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고, 그야말로 인생의 디테일을 꼭꼭 씹어먹는 법을 알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
아름다운 문학작품의 모든 주인공들은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더 자주 놀라라. 더 깊이 모든 것을 사랑하라. 더 많이 웃고, 울고, 미소짓고 경탄하라. 재빨리 스토리를 알아내려고 하지 말고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문학작품을 읽고, 전시관을 휙휙 스쳐 지나가며 유명한 작품만 눈여겨볼 것이 아니라 모든 작품을 세밀하게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천천히 되새기고 음미하고 찬탄하라고. 대상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서 잠시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 보자. 세상의 아름다움이 나를 그저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대상의 아름다움과 달콤한 향취를 남김없이 빨아들이고 진정한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보자고.
문명의 편리를 가성비 최고의 효율성으로 섭취하느라,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는 법, 따스한 차 한 모금을 천천히 향유하는 법, 우리 곁을 스쳐가는 아름다움의 옷깃을 잠시라도 잡아 볼 권리를 잊지는 않았는지.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시인 윤동주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우리 주변의 작은 존재들의 속삭임에 좀 더 세심하게 귀를 기울여 보자.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그저 스쳐 지나가지 않도록. 삶의 아름다운 정수를 우리가 마음껏 향유할 수 있도록. 아름다움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우리가 귀찮고 지루하다며 ‘스킵’하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다급한 성질을 참지 못하고 ‘빨리감기’버튼만을 누르지 않는다면. 아름다움은 항상 우리 편이며, 생은 항상 더 눈부신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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