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시를 읽고 쓰는 데 별다른 이유가 있진 않을 것이다. 다른 예술처럼 그러고 싶어서 그러할진대, 음악이나 미술처럼 어느 경지에 이른다고 하여 특별히 명예나 부가 따르는 것도 아니다. 대학교수라는 허명은 시보다는 논문에 의해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시집이 많이 팔리는 경우도 거의 없을뿐더러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베스트셀러라고 해도 시집 한 권이 나오는 데 몇 년이 걸린다고 생각하면 어지간한 직장인 연봉에 비할 바 아니다. 문학상의 영예는 한순간의 기쁨에 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해에 무수한 시집이 쏟아지고, 또 새로운 시인이 탄생한다. 며칠 후 마감할 ‘한국일보’ 신춘문예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천한 시력에 염치도 없이 심사를 맡은 적이 있다. 수백 명의 응모자가 보낸 수천 편의 시가 담긴 종이상자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세상에 시인이 이렇게나 많다니, 등단 따위 했거나 말거나 시를 쓰는 그 순간만큼은 누구나 다 시인이니까.
그 시인됨의 순간을 사랑한다. 그 순간에만 내가 시인이라고 느낀다. 시인이라는 직함을 얻은 지 내년이면 15년이 되지만 여태껏 어디 가서 “저 시인입니다.” 하는 소리를 포부 당당하게 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그 잘난 직함을 밝혀야 하는 자리에 서면 “시 쓰는 아무개입니다.” 하고 쭈뼛거리고 만다. 타고난 겸손 때문이 아니다. 시를 쓰는 순간이 아니라면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대체로 부끄러움만 안긴다. 어쩐지 실패한 인생 같아 보이기도 하고, 유난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것만 같고, 과도한 낭만성과 비대한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보일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없다고 할 수 없이 자주여서 더욱 부끄러워진다. 자고로 시인입네 하고 다니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옛말이… 있을 법도 한데 없다는 게 되레 이상한 일이다.
이 모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시 쓰는 아무개로 살아가는 이유는 시를 쓰는 순간의 지극한 찬란 때문이다. 시를 구상하고 쓰고 지우고 다시 써서 마침내 완성하는 그 과정의 좌절과 정성을, 고단과 찬탄을 잊지 못해 오늘 밤도 누군가는 빈 문서 앞에 앉아 있을 것이다. 등단했거나 아니거나 상관없이. 그렇게 완성된 거의 모든 글은 아름답고 귀하다. 외로움이 사무치거나 삶이 기괴하고 요란할 때에나 이러하고 저러하고 아무튼 별의별 때에 내 안에 문장들이 꿈틀대서 뭐라도 끼적였다면 그 글이 시가 되지 않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일기든 넋두리든 낙서든 아무런 것이나 일단 써 보고, 스스로 읽기에 더 멋지게 바꿔 보고 색다르게 시도해 보면 그것은 좋은 시에 더욱 가까워진다. 괜히 낭독도 해 보고, 본인 목소리에 취해 리듬감도 살려 보고 거기에 맞춰 연과 행을 나누다 보면 시는 점점 더 완벽해진다. 바로 시인이 탄생한 것이다. 시인됨의 순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나 또한 내게 벌어졌던 그러한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기에 어디 가서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시 쓰는 누구입니다” 하며 스스로를 소개하고는 씩, 웃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시가 찬란한 자기만의 순간에서 벗어나 세상에 나올 때 제삼자의 판단이 끼어든다. 지금껏 순간의 천재들이 구축해 놓은 한국시의 문법과 구성과 작법의 그물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데, 신춘문예도 그 그물망 중 하나이다. 대부분 놓치고 하나 건진다. 놓친 시인 중에 엄청난 시인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 시인들의 빛나는 순간을 겨우 몇 명이 며칠 동안 하는 심사라는 제도로 건져낼 수 없음이 자명하다. 신춘문예 마감이 며칠 남지 않았다. 이 어리석고 단단한 제도를 우회해도 괜찮다. 무시해도 상관없다. 물론, 통과해도 좋다. 하나만 이야기하고 싶다. 시를 쓰는 순간을 사랑하자고. 모든 것의 시작은 그 한순간이었을 것이다.
서효인 시인ㆍ문학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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