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차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 3차 회의가 열린 지난달 18일 서울 동대문구 한국국방연구원 앞에서 민중당 및 민주노총 관계자 등이 분담금 인상 반대 등을 촉구하며 거리 행진을 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서재훈 기자

“1970년대 동북아시아에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국민들을 고문하는 나라가 있었다. 사람들은 북한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그건 남한이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가 2011년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이야기이다. 당시 동북아와 세계정세가 만만치 않았다. 68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리처드 닉슨은 이듬해인 69년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미국은 이제 군사개입을 줄일 테니 아시아 나라들은 알아서 자기 방위를 책임지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71년 주한미군 7사단 2만여 명이 미국으로 철수했다. 박정희가 자주국방을 외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내가 박정희에 유일하게 동의하는 부분이 자주국방(핵무장은 빼고)이다.

부자나라들이 안보에 무임승차한다는 트럼프 미 대통령의 요즘 발언들을 보면 반세기 전의 닉슨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트럼프가 요구하는 방위비 분담금 50억 달러가 천문학적으로 큰 액수이기는 하나, 그 돈으로 한반도의 확실한 평화를 ‘구매’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 돈으로 평화를 살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다. 트럼프의 청구서에는 그게 없다. 발상을 바꿔, 한국과 주한미군의 방위비 부담을 줄이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끝내고 북미 간 그리고 남북 간 적대관계를 종식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한반도의 비핵화도 반드시 달성되어야 한다. 남북미 3국이 정상적인 국가관계를 맺게 된다면 주한미군의 숫자를 대폭 줄일 수 있다. 미국은 더 이상 돈 많이 드는 전략자산 전개나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에는 중국 턱밑에 칼끝을 들이밀고 있는 미국의 이득이 누락되었다. 미국의 새로운 전략이라는 인도-태평양 전략은 누가 봐도 대중국 포위 전략이다. 트럼프의 계산서에는 주한미군이 이미 대중국 포위의 최선봉에 있었다는 사실이 빠져 있다. 우리가 오히려 새로운 청구서를 보내야 할 판이다.

외교든 안보든 미국에게 모두 맡기자는 분들에겐 특별한 고민거리가 없을 것이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 참여해서 중국과 척지더라도 확실하게 미국 편에 서야 하고 그를 위해 일본과의 지소미아도 계속 유지해야 하며 50억 달러 정도의 방위비는 기꺼이 증액해 줘야 한다, 이런 결론에는 무슨 심오한 세계정세분석 따위가 필요 없다. 미국이 원하는 대로 하자는 전략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일관되게 지속되어서 딱히 전략이라 부를 것도 없다. 세계정세나 외교나 안보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 같은 ‘옆집 아저씨’도 그 정도 말은 할 수 있다. 다만 일반 국민으로서 궁금한 점은 그 결과로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가 정당화된다는 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대목이다.

미국은 대대로 우리의 참혹했던 과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트럼프는 닉슨마냥 미국의 비용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동맹국의 군비증강과 방위력 강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일본의 재무장도 포함된다. 이는 평화헌법을 개정해 정식군대를 보유하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국가가 되려는 아베 총리의 야심과도 맞아 떨어진다. 유엔사령부는 최근 한반도 유사시 일본 자위대의 역할수행을 언급한 바가 있다. 미국에게 한국은 ‘넘버3’의 자리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우리가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 동참한다고 해서 이 지위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세계정세를 분석해서 외교와 안보전략을 짜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자주독립 국가를 이루고 평화롭게 살기 위함이다. 미국 우선주의에 우리도 적극 편승하자는 주장은 필연적으로 국가안보를 위해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눈감아 주자는 기묘한 결론에 이르게 될 텐데, 말하자면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세계정세를 냉철하게 분석한 고도의 아시아 경영전략이니 우리도 이를 적극 받아들이자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그보다는 차라리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을 통한 인도 및 아세안과의 협력강화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만나는 접점을 우회적으로 확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인다. 지난주에 있었던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를 국내언론이 냉담하게 다루거나 그저 물건 팔아먹을 시장 확대 정도로만 인식하는 모습이 그래서 무척 아쉬웠다.

미국에겐 미국의 전략이 있고 일본에겐 일본의 전략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우리의 전략이 있어야 한다. 대륙과 육로로 연결된 한반도와 바다로 갈라진 일본은 그 지정학적인 형편에 따른 전략이 다를 수밖에 없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키워드가 인공지능인데, 사물에 지능을 집어넣기 전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지능으로 세상을 보는 능력부터 키워야 하지 않을까?

“금지되지 않은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물리학자들이 좋아하는 말 중의 하나이다. 70년대에 그랬듯이 지금은 미국의 이해에 따라 주한미군이 철수할 수도 있다. 현실적인 확률이 아주 높아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이제는 우리의 전략 속에 주한미군 없는 한반도라는 그림까지 추가해야 할 상황이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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