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가족들과 다 같이 모여 있는데 갑자기 빅뱅 같은 굉음이 났어요. 저는 바닥으로 나가떨어졌고, 이미 제가 죽었다고 생각했죠.”
북아일랜드의 신교도ㆍ구교도 간 유혈 분쟁이 아직 한창이던 1987년 11월 4일, 에니스켈렌에서 열린 영국군 추도식에 참석했던 조 홀비치(68)는 그날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말했다. 이날 북아일랜드 독립파인 아일랜드공화군(IRA)이 자행한 폭탄 테러로 12명이 목숨을 잃고 6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조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수십년을 ‘극단적 선택’을 부추기는 충동에 시달리며 살아 왔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1일(현지시간) 조의 사연을 전하면서 “북아일랜드는 전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라고 보도했다. 1998년 체결된 벨파스트 협정으로 분쟁이 종식된 지도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이가 폭력과 죽음의 상흔을 끌어안고 살고 있으며, 이게 ‘높은 자살률’이라는 사회적 징후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매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 수가 차량 추돌 사고 사망자의 세 배에 달한다고 영국 BBC방송은 전했다.
북아일랜드 통계청에 따르면 북아일랜드의 자살률은 10만명당 18.5명(2017년)으로 세계 15위 안에 드는 수준이다. 같은 영국(UK)에 속하는 잉글랜드(10만명당 9.2명)의 두 배다. 이와 관련, NYT는 “전문가들은 빈곤과 미비한 정신건강 서비스, 최근 증가한 불법 무장단체의 폭력 등 여러 원인이 있다고 말하지만, 핵심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 짚는다”고 전했다. 존 역시 PTSD 진단을 받았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북아일랜드 분쟁(The Troubles)은 소수 가톨릭 독립파인 IRA와 영국 간의 유혈 대립을 통칭한다. 영국 잔류를 바라던 신교파 주민들의 준군사조직 얼스터방위동맹(UDA)까지 개입해 30년에 걸쳐 숱한 테러와 납치, 살인이 벌어졌다. 3,500여명의 사망자와 5만명 가까운 부상자를 냈던 갈등은 벨파스트 협정이 체결되면서 겨우 봉합됐다.
그러나 협정 체결 이후 20년간 자살률은 오히려 배로 늘었다. 이에 대해 아일랜드 얼스터대 시본 오닐 정신건강과 교수는 “(분쟁 중엔) 갈등이 극단적 선택을 하려는 충동을 느낀 이들에게조차 ‘살아야 한다, 싸워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부여한 것 같다”면서 “그러나 분쟁 후 많은 이들이 싸움이 무슨 의미였는지, 얻은 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웠고 자살률이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높은 자살률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9월 북아일랜드 보건부는 오는 2024년까지 자살률을 10%포인트 줄인다는 방침을 내놨다. 그러나 NYT는 민감한 문제라는 이유로 분쟁에 대한 언급 자체를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살 위기’ 대응을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테러 생존자 등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공유하거나, 의학적 도움을 요청하기 쉽지 않아서다. 또 부족한 예산도 문제다. 잉글랜드는 전체 건강 예산의 13% 정도를 정신 건강 부문에 투입하는 데 비해, 북아일랜드가 투입하는 예산은 5%에 불과하다고 NYT는 꼬집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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