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인가, 사기꾼인가.
홍콩과 대만, 호주에서 활동했다고 폭로하며 중국 스파이를 자처한 왕리창(王立强ㆍ26) 파문이 점입가경이다. 내달 11일 대만 대선에서 재선고지를 노리는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왕리창을 굳히기 카드로 활용하자 중국과 대만 국민당은 “일개 사기꾼에 불과하다”며 반격에 나섰다. 여기에 미국의 인도ㆍ태평양전략 주요 축인 호주까지 가세하면서 중국을 포위해 서로 치고받는 난타전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중국 정보기관 소속 홍콩 주재 창신(創新)투자공사 직원인 왕씨가 지난달 24일 호주안전정보원(ASIO)에 망명을 신청할 때만 해도 낯익은 중국 간첩 사건으로 비쳤다. 시드니모닝헤럴드 등 호주 언론은 왕씨가 차이 총통 낙선을 위해 15억위안(약 2,500억원)을 들여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 20만개를 개설한 반면, 경쟁자인 친중 성향 한궈위(韓國瑜) 국민당 후보에게는 2,000만위안(약 33억원)을 전달하는 과정에 관여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홍콩 대학 학생회에 침투해 민주화 시위에 개입하고, 호주에서는 친중파 의원의 원내 입성을 위해 공작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방산업체 투자사인 창신투자공사 샹신(向心) 총재는 간첩 혐의로 붙잡혀 대만에 억류돼 있다.
하지만 일주일간 몰리던 중국이 공세로 돌아섰다. 관영 환구시보는 2일 “왕씨는 2016년 460만위안(약 7억7,000만원)의 사기 사건에 연루돼 징역 15개월을 선고받은 전과자”라며 그의 법정 판결 당시 동영상을 공개했다. 또 “20대 중반에 불과한 왕씨가 여러 나라를 넘나들며 그토록 중요한 공작을 주도할 수 있겠느냐”면서 “기껏해야 간첩 끄나풀에 불과할지 모르는 청년을 기다렸다는 듯 반중 여론몰이에 악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부 외신도 이번 사건을 ‘웃음거리(farce)’라고 표현하면서 왕씨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외교 소식통은 2일 “해외 정보기관에서는 왕씨의 진술이 일부 석연치 않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진실 논란이 확산되는 가운데 대선을 한 달여 앞둔 대만 정치권은 이번 사건을 유리하게 활용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우자오셰(吳釗燮) 대만 외교부장은 “과거 의혹만 무성하던 중국의 대만 침투 공작이 사실로 확인됐다”고 강조하며 왕씨의 스파이설을 확대했다. 반면 차이정위안(蔡正元) 국민당 부사무총장은 2일 글로벌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왕씨의 대학시절 동기생과 교수들의 증언까지 거론하며 “그의 쇼는 모두 끝났다”면서 “차이 총통은 표심을 자극하기 위해 간접 모략극을 폈지만 가짜로 판명됐다”고 반박했다. 반중 노선을 내세운 차이 총통은 홍콩 시위 지지여론에 힘입어 지난달 26일 빈과일보 조사에서 42.2% 지지율로 22.7%에 그친 한궈위 후보에 우위를 점하고 있다.
베이징=김광수 특파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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