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크지 ‘오늘의 SF’ 편집위원 정소연ㆍ정세랑ㆍ듀나ㆍ고호관 대담
“SF, 한국 문학서 중심성 획득” “소수 덕후 넘어 대중의 장르로”

2019년은 한국 SF문학의 새로운 원년이라 할 만하다. 온라인 서점의 장르문학 판매량(예스24 집계 7월까지 25만7,000권, 지난해 대비 20.7% 증가)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고, 전문 출판사 허블과 안전가옥, 아작 등을 구심점으로 다양한 작품이 쏟아졌다. 국내 대표 SF작가 김보영의 소설 3종의 영어 번역 출판권이 미국 최대 출판그룹 하퍼콜린스에 판매됐고, 순문학의 성지로만 여겨졌던 각종 문학상의 후보나 수상자로도 SF소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가히 질적, 양적으로 한국 SF문학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SF문학은 변방의 문학’이라는 서술이 국내에서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기, SF전문 무크지 오늘의 SF가 최근 탄생했다. 오늘의 SF 창간호 편집위원인 정소연ㆍ듀나ㆍ정세랑ㆍ고호관 작가와 함께 한국 SF문학의 현주소를 짚고 미래를 고민하는 대담을 가졌다. 대담은 지난달 27일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이뤄졌다.

SF무크지 '오늘의 SF' 창간호의 편집위원. 왼쪽부터 정소연, 듀나, 정세랑, 고호관 작가.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는 등,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한국 SF문학에서 감지된다.

듀나=“십여년 전부터 국내 SF는 꾸준히 양적, 질적 성장을 이뤘다. 올해의 성과는 그 성장이 가시화된 결과다. 문학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자체가 바뀌는 중인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독자들은 이전에 순문학으로 제한해서 생각한 문학의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다. 작가들 역시 쓰고 싶어하는 영역과 스타일이 넓어지고 있는데, SF도 거기에 포함되는 거다.”

정세랑=“그래도 올해만큼 다종의 작품이 쏟아져 나온 해는 없는 것 같아 기념할 만하다. 특히 더 이상 신인들의 계약이나 출간이 어렵지 않다는 게 분명해졌다. 10년 전만 해도 장르 신인은 출간 계약이 어려웠는데 이제는 경쟁적으로 계약 중이다.”

정소연=“작년 올해 정도를 기점으로 어느 선을 넘어 안정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번역된 해외 SF를 읽은 작가군이 아닌 처음부터 한국 SF를 읽고 성장해 자연스럽게 한국 SF를 쓰게 된 작가들이 많아졌다. 그간 누적된 한국 SF라는 읽을거리가 한 사람이 작가로 데뷔하기 전에 읽고 흡수할 만큼 양적, 질적으로 늘어났다는 뜻이다.”

-작품 발표와 비평의 장을 형성할 수 있는 잡지의 역할이 크고 또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듀나=“일단 비평의 영역이 넓어졌다. 아무래도 창작물의 성장에 비해 비평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일반 독자의 관점도 필요하겠지만, SF 장르 내에서 특화된 관점도 필요하니까.”

정세랑=“성취가 자꾸 누락되고 기록되지 않았던 부분을 제대로 기록할 수 있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소연=“SF가 문학장에서 현재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SF가 꾸준한 성장과 시장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소위 본격문학의 ‘대안’이나 ‘가능성’ 같은 모호한 말로 주변화돼 온 감이 없지 않은데, 단일 장르 무크지 창간은 SF의 존재감이 이를 넘어 현재 한국 문학과 한국 문화에서 중심성과 현재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창간호에는 소설뿐 아니라 작가론, 비평, 인터뷰, 서평, 에세이, 기행문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이 실렸다. 창간호를 엮으면서 특히 염두에 뒀던 점이 있다면?

정세랑=“이 정도로 소설이 많이 실리는 잡지는 잘 없을 것 같다. 소설에 힘을 많이 줬다. 확장성은 있으면서 메인은 힘있게 SF와 SF소설가로 중심을 잡았다.”

정소연=“작가론이 중심이라는 점에는 편집위원들 전원이 동의했다. 그 외에, SF로부터 파생되는 문화라고 하면 아예 게임이나 만화, 영화같이 매체 자체를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 문예지로서도 충분히 재미있는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인터뷰도 신경을 많이 썼다. SF작가들에게 인터뷰 제안이 들어오는 경우 작품이 아닌 ‘SF란 무엇인가?’ 수준의 질문만 반복적으로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 단계를 넘어선 인터뷰 코너가 필요하다고 봤다. 사실 한국의 독자들은 진작 ‘SF란 무엇인가’같은 질문을 넘어선 자리에서 좋은 SF를 읽고자 하고 있는데, 그런 독자들이 원하는 콘텐츠가 충분히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SF의 수혜를 입고 자란 젊은 작가들에게 SF적 상상력은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다.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2018한국과학문학상 장편부문 대상을 차지한 박해울 작가의 '기파', 지난 겨울 데뷔한 문목하 작가의 '유령해마'
-‘판타스틱을 비롯해 앞서 SF 전문 잡지가 있긴 했다. 과거 잠시 존재했던 SF잡지들로부터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그리고 ‘오늘의 SF’는 이들과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듀나=“일단 게토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 차이가 있다. 옛날엔 국내 SF독자가 500명이라는 농담도 있었다. 소수의 덕후 또는 엘리트를 위한 장르라는 자의식이 있었는데 작가군도 독자층도 두터워져서 이제는 정말 일반 대중의 장르가 된 것 같다.”

고호관=“게토일 때는 외연을 넓힌다고 무리한 시도를 좀 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SF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다.”

정소연=“소수 덕후 장르라는 선입견 때문에 SF 외 주변까지 포섭하려다 보니 초점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과거의 잡지들은 그때 그 시점에 맞는 시도이자 도전인 면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스탠스를 모호하게 되지 않아도 될 만큼 대중성과 추진력이 있으니 이제는 이런 잡지를 만들 때가 된 것이다.”

-지금의 젊은 작가들에게는 SF가 자연스럽다는 느낌도 있다. 이들에게 SF가 친숙하고 매력적인 장르인 이유는 뭘까. 그리고 그들이 쓰는 SF는 이전의 SF와 어떤 차별점을 가질까.

듀나=“소설로만 보면 신기할 수 있지만 웹툰, 영화, TV시리즈를 포함하면 SF장르는 결코 비주류가 아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SF장르로 소설을 쓰는 건 그냥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조금 늦었다고 할 수 있는데, ‘문학은 이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당연한 창작욕을 막고 있었던 것 같다.”

정소연=“SF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보면 SF는 가장 현재적인 장르다. 우리는 이미 과거 SF의 설정 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밀착력은 SF가 더 강하다. 오히려 본격문학에 나오는 사람들이 더 비현실적이다. 대졸자도 너무 많고, 고뇌도 문창과(문예창작과)적이고. 본격문학 속 사람들은 휴대폰을 안 쓴다. 반면 SF는 통신기술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미시적인 예지만, 관계 맺음의 방식이나 세계의 크기 등에서 SF가 더 자연스럽고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면이 있다.”

정세랑=“한국은 변화가 빠르고 가치관의 충돌도 자주, 강하게 일어나는 사회라는 점에서 SF의 현실 밀착력이 더 강해지는 것 같다.”

듀나=“전통적인 한국 순문학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극도로 장르적이다. 순문학적 캐릭터와 사건들이 있다. 우리가 순문학이라고 부르는 건 세계가 쉽게 바뀌지 않은 시대의 산물인데, 지금은 세계의 변화와 변화 가능성이 문학적 소재인 시대다.”

고호관=“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SF가 아닌 걸 쓰는 게 더 어렵지 않나 싶다.”

정세랑=“그럼에도 문단에서는 SF를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여전히 든다. 국수 고명으로 얹어 주기는 하는데 이해는 못하는 느낌이다.”

올 한해 출간된 다양한 주제의 SF앤솔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SF는 어렵고 낯설다는 독자들도 있다.

정세랑=“독자들은 진입로만 찾으면 잘 읽는다. 그래서 잡지가 진입로가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는 SF접촉면이 너무 짧고 좁았다. 접촉면을 넓히고 길게 노출하면 금방 진입로를 찾을 것이라고 본다.”

정소연=“지금 10대 후반만 돼도 학교에서 이미 구병모 작가의 ‘위저드 베이커리’ 같은 작품을 필독서로 읽고 성장한 독자들이다. 장르 안에도 여러 작품이 있다. 본격문학에서도 김훈을 좋아하는 독자와 정세랑을 좋아하는 독자가 겹치긴 어렵다. 무크지는 독자들에게 자기 취향을 발굴할 좋은 기회다.”

고호관=“골라 읽을 수 있다는 건 좋은 거다. 나만 해도 20년 전에는 (SF소설은) 다 읽었는데 이제는 출간되는 양을 못 따라잡는다. 취향에 맞게 읽을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앞으로 SF문학의 과제는 무엇일까.

정세랑=“10년, 20년, 계속해서 안정적인 지면을 만드는 것. 그리고 잡지를 통해 그 동안 장르 쪽에는 잘 주어지지 않았던 공공의 지원도 끌어들이고 싶다. 대부분의 문예 지원은 잡지를 통해 이뤄지니까. 지원에서 장르 작가들이 차별 받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정소연=“SF는 활력 면에서 지속성을 갖기 좋은 장르다. 지속가능성과 예측가능성이 생기면 독자도 창작자도 훨씬 안정되고, 그러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오고, 더 풍요로운 문학생태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듀나=“아무래도 지금 한국 SF 역사는 사각(死角)이 많다. 역사를 기록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있었지만 잊힌 창작물과 번역물이 있다. 잊힌 과거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무엇이 SF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창작물을 쓰는 사람이 SF의 틀 안에서 생각하고 작품을 내놓는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정리=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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