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대 위 배우들이 대사를 하지 않고 움직임만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사이, 한 쪽 귀에 낀 이어폰에선 이런 말소리가 흘러 나온다. “남자가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뛰어 들어오자 무대가 서서히 어두워진다. 어둠 속에서 큰 달이 푸른 빛으로 발하고, 그 위에서 남자가 휴대전화로 주위를 이리저리 비춰본다.…”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지난 10월 무대에 오른 ‘그믐, 또는 당신을 기억하는 방식’이 배리어 프리(Barrier freeㆍ장애인에게 차별적인 물리적, 제도적 장벽이 없는 것)로 공연되던 모습이다.
남산예술센터는 ‘그믐…’의 공연기간 19일 중 이틀을 배리어 프리 방식으로 무대에 올렸다. 객석 맨 뒤 12개 좌석에 자막이 흐르는 스마트폰 단말기를 설치하고 FM수신기를 배치해 시ㆍ청각 장애인도 작품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센터는 지난 4월 연극 ‘7번국도’를 시작으로 올해만 4개 작품에서 배리어 프리 공연을 시도했다. 수어 통역, 음성 해설, 자막 제공 등이 이뤄진 덕에 100명에 가까운 장애인들이 이들 작품을 즐겼다. 장애 관람객이 두 손에 꼽을 정도였던 이전 몇 해와 비교하면 상당한 진척이다.

일부 소극장을 중심으로만 시도됐던 배리어 프리가 올 들어 국내 공연계의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남산예술센터 같은 중극장들이 올해부터 배리어 프리를 염두에 두고 다수 작품을 꾸려가고 있고, 대한민국연극제 등 대형 연극제에서도 배리어 프리 공연이 편성됐다. 하지만 장애인들은 “배리어 프리라고 정의하기엔 여전히 미흡한 환경”이라고 말한다. 관객으로서 원하는 때, 원하는 곳에서 마음껏 작품을 즐기지 못하는 현실은 크게 개선되지 않아서다.
무엇보다 공연장 중 장애인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 매우 적다. 장애인의 공연 접근성을 연구해 온 0set프로젝트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서울 혜화동 대학로 공연장 120곳 가운데 장애인이 활동보조 없이 입장할 수 있도록 시설을 조성한 곳은 14곳(11.7%)에 불과했다. 부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공연장 역시 21곳(17.5%) 뿐이었다.
시설이 마련돼 있다 해도 장애인 관객이 자유롭게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연극을 제외하고는 무용이나 국악, 뮤지컬 장르는 배리어 프리 도입률이 낮고, 연극조차도 공연 전 회를 배리어 프리로 하는 극장은 드물다. 청각장애인인 이현서(27)씨는 “대부분 지정일에 자막ㆍ수어 해설을 제공하고 있어서 직장 일정 등을 고려하면 선택 폭이 정말 좁다”고 토로했다.

유럽 등 공연 문화가 성숙한 국가에서 배리어 프리는 다양한 형태로 자리잡았다. 시ㆍ청각 장애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공연 시작 전 무대와 소품을 직접 만져보고 가까이서 경험하는 ‘터치 투어(Touch Tour)’는 이미 보편적이다. 핀란드국립발레단은 2014년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 전 장애인 관객을 초대해 발레복과 토슈즈, 가면 등을 직접 만져볼 수 있게 했다. 대사, 서사가 없거나 부족한 무용 작품 접근이 장애인들에게 특히 어렵다는 점을 고려했다. 영국 국립극장은 지난해 말부터 자막과 배경 설명이 흐르는 ‘스마트 안경’을 도입해 장르나 회차에 상관 없이 언제든 청각 장애인들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영미권에선 지체 장애인뿐만 아니라 정신 장애인 관객을 위한 배리어 프리 공연 형태도 속속 도입 중이다. 자폐증 등을 겪는 관객들이 공연 도중 자유롭게 극장 안팎을 이동할 수 있도록 한 ‘릴렉스 퍼포먼스(Relaxed Performance)’와 뇌 자극을 최소화하도록 조명, 소리를 낮은 수준으로 조정한 ‘감각 친화적 퍼포먼스(Sensory Adapted Performance)’가 대표적이다. 지난달 29일 남산예술센터에서 열린 극장 접근성 포럼에 참석한 0set프로젝트의 신재 연출가는 “각 공연장은 관객으로 장애인이 온다는 것을 항상 전제해야 한다”며 “저마다 장애인과 머리를 맞대고 현실적 매뉴얼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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