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언론인의 글을 보다가 지난 21일 밤 ‘행간’이란 단어가 난데없이 포털 검색어 1위에 올라온 사실을 알게 됐다. 많은 사람이 갑자기 행간의 뜻을 찾아봤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 시점에 네이버 검색창에 뜬 첫 번째 설명은 엉뚱하게도 ‘행간(行姦) : 명사. 간음을 행함’ 이었고 ‘다른 뜻 보기’를 눌러야 우리가 흔히 아는 ‘행간(行間): 1. 쓰거나 인쇄한 글의 줄과 줄 사이’ 또는 행과 행 사이 2. 글에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으나 그 글을 통해 나타내려고 하는 숨은 뜻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지적을 받고 지금은 반대로 후자가 먼저 나오게 수정됐다.
□ 소동은 그날 방영된 KBS 2TV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마지막 회에서 노규태(오정세)와 홍자영(염혜란)이 나눈 대화 때문에 일어났다. 연하의 찌질이 남편과 연상의 변호사 아내로 나온 두 사람의 연애 장면에서 노규태가 “근데, 누나, 누나 동기 새끼들은 다 판검산데 왜 나랑 결혼을 해”라고 묻자 홍자영이 “난 너랑 있으면 편해, 넌 사람이 행간이 없잖아”라고 답한 것이다. 노규태가 말 뜻을 몰라 머뭇거리자 홍자영은 재차 “행간!”이라고 분명히 일러준다. 포털 검색창이 ‘행간’으로 불난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 ‘생활밀착형 치정 로맨스’라는 장르물로 시작한 드라마는 주ㆍ조연을 가리기 힘든 출연진의 열연과 베일에 싸인 작가, 축약과 해학의 ‘촌므파탈’ 충청도 사투리 등으로 시종 화제를 모으며 최종회 시청률 23.8%로, 자체 최고는 물론 올해 지상파 미니시리즈 최고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홍자영의 닦달에 놀란 시청자들이 행간을 검색어 1위로 만든 데서 입증된다. 더 흥미로운 것은 많은 사람이 드라마를 통해 행간의 뜻을 알게 되고 나아가 ‘행간 없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 점이다.
□ 하지만 후배의 지적처럼 현실에선 노규태 같은 사람을 찾는 게 쉽지 않고 행간을 읽어야만 진실이 보이는 일이 즐비하다. 얼마 전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경기 대응을 위한 확장재정의 당위성을 강조하다 “곳간에 작물을 쌓아두기만 하면 썩어버린다“고 말해 구설수를 타자 “행간의 의미를 잘 봐달라”고 해명했다. “어쩔 수 없이 쓸 때는 써야 한다”는 뜻이 행간이란다. 곳간 비유의 부적절함은 그냥 뭉갰다. ‘동백꽃…’ 작가는 당국자 말의 행간까지 읽어야 하는 국민의 피곤함을 꼬집는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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