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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정신승리’라는 비아냥

입력
2019.11.28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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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화(왼쪽) 외교장관과 모테기 도시마쓰 일본 외무장관이 23일 일본 나고야에서 한일 외교장관 회담 시작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나고야=연합뉴스
강경화(왼쪽) 외교장관과 모테기 도시마쓰 일본 외무장관이 23일 일본 나고야에서 한일 외교장관 회담 시작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나고야=연합뉴스

불리하거나 치욕스러운 상황에 직면하면 자책감에 괴로워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왜곡해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자기위안을 찾는 행위를 ‘정신승리’라고 한다. 이솝 우화 중 ‘여우와 포도’에서 여우는 나무 높이 열린 포도를 따먹지 못하게 되자 “저 포도는 어차피 신 포도일 거야”라고 말한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 목표를 포기한 자신의 결정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이다. 가히 ‘정신승리’의 원조격이다.

□ 중국의 사상가이자 소설가인 루쉰의 ‘아큐정전’에는 무뢰배들에게 폭행당한 주인공 아큐가 “아들뻘 되는 녀석들과 싸울 필요가 있나” 하며 자위하는 대목이 나온다. 일종의 자기최면이자 인지부조화 상태로 정신분석학에 나오는 방어기제 중 자기합리화라 할 만하다. 루쉰은 이를 ‘정신승리법’(spiritual victory)으로 표현했다. 최하층 빈민이면서도 자만심만 크고 과거에 붙잡혀 사는 아큐를 청나라 말기 민중들의 전근대성으로 표상화한 루쉰의 의도는 분명했다. ‘정신승리’ 타파를 명실상부한 민중혁명의 출발이자 완결로 여긴 것이다.

□ 2019년 한국 사회에서 ‘정신승리’라는 용어의 원류(源流)는 인터넷 공간이다. 각종 커뮤니티의 ‘병림픽’ 혹은 ‘키배’(키보드 배틀)를 잠시만 들여다봐도 금방 확인된다. 상대가 자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부터 ‘정신승리’로 몰아가고, 그 상대는 이를 ‘반사’한다. 양상은 무한반복이다. 사실과 근거에 기반한 논쟁은 없고 비난과 비아냥이 난무한다. 욕설에 가까운 무시와 힐난이다. ‘정신승리’라는 용어로 전달하려는 바가 소시민적 자기만족이나 불안감 회피 정도면 모를까, 결코 합리적ᆞ객관적 지적이나 생산적 비판일 수 없는 이유다.

□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종료 결정 유예를 두고 논란이 크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지소미아 카드가 적절했는지, 미국 입장을 감안할 때 종료 결정이 앞으로도 유용할지, 애초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 이후의 대처에 문제는 없었는지 등을 꼼꼼히 따지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일본은 이구동성으로 여론전인데, 정부의 설명과 반박을 선택적으로 수용해 ‘정신승리’ 운운하는 건 민망하다. 정치인들이야 그렇다 쳐도 지식인들이 자기 주장의 완결성에 갇혀 생산적인 논쟁과 토론은 뒷전인 채 조소하고 비아냥대는 작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양정대 논설위원 torc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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