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 최근 전례 없이 특별한 ‘정자은행’이 세워졌다. 바로 에이즈(AIDSㆍ후천성면역결핍증)의 원인인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양성 판정을 받은 환자들의 정자를 기증받는 ‘스펌 포지티브’(Sperm Positive)다. HIV가 혈액ㆍ정액 등의 체액, 성관계ㆍ출산 등을 통해 전염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만큼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싶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영국 가디언, BBC 방송 등은 27일(현지시간) 이 단체가 “에이즈와 HIV를 둘러싼 오해들과 싸우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다”며 그 설립 취지를 밝혔다. 이미 세 명의 HIV 양성 남성 환자들이 정자 기부를 약속한 상태다. 이 단체는 이들 기증자 모두 지속적인 약물 치료를 통해 혈액 내 바이러스 수치가 일반적인 검사 방법으로는 감지되지 않는 수준으로 낮다고 밝혔다.
가디언은 “물론 완전히 HIV가 치유됐다는 건 아니지만, 전염성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뉴질랜드 에이즈 재단 등 옹호단체 3곳은 ‘세계 에이즈의 날’(12월 1일)을 앞두고 이 온라인 클리닉을 설립했다. 이들은 ‘스펌 포지티브’ 프로젝트를 통해 HIV 보유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줄이고, HIV 전염에 대해 일반인들에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정자 제공’ 자체보다도 실제로는 캠페인 목적이 큰 셈이다.
기증자 3명 중 한 명인 데미안 룰 닐은 뉴질랜드 라디오 인터뷰에서 HIV 감염 사실을 고용주에 말한 이후 회사 내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결국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고 밝혔다. 그는 “약물을 적절히 복용할 경우 전염이 안 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뒷받침되는 사실”이라면서 “과학과 의학 기술이 우리에게 (출산) 능력을 다시 되돌려주고 있다”고 말했다. 룰 닐은 1999년 HIV 보유 진단을 받았으나 현재는 건강하며, 두 명의 자녀와 세 명의 손주를 슬하에 두고 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대 부교수인 마크 토마스 박사는 가디언 인터뷰에서 “지난 30년간 동안 HIV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에 큰 변화가 있었으나, 아직도 많은 HIV 보유자들은 오명을 쓰고 있다”면서 “오명과 차별에 대한 두려움은 위험에 놓인 사람들이 검사를 받는 것을 가로막고, 치료ㆍ지원에 대한 환자들의 접근을 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스펌 포지티브는 일반인들에게 HIV와 관련해 정확한 정보를 알리는 것뿐 아니라 보유 진단을 받은 환자들에게 출산의 기회를 주고, 이들도 보조 생식술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다만 이 클리닉이 직접 보조 생식술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며, 신청자가 이용을 원할 경우 지역 불임 클리닉과 연계해 운영될 예정이다.
가디언에 따르면 최근 몇 년 간 HIV 치료에는 여러 진전이 있었으며, 올해 3월에는 HIV에 감염된 생존 기증자가 같은 HIV 감염자에게 신장을 이식하는 수술이 미 존스홉킨스병원에서 최초로 실시되기도 했다. 체내에서 HIV 복제를 막는 ‘항레트로 바이러스 요법’을 통해 혈액 내 바이러스 양을 감지할 수 없는 수준으로 낮춘 덕분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전 세계 약 3,800만명(2018년 기준)의 사람들은 HIVㆍ에이즈로 고통받는 실정이라고 BBC는 말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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