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층 커진 러시아 영향력 전달 의도
러시아 크렘린궁이 매년 출시하는 이른바 ‘푸틴 달력’의 2020년도판이 26일(현지시간) 공개됐다. 과거 푸틴 달력들이 상의 탈의 사진 등으로 유독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남성미를 강조했던 데 반해, 이번에는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레드 카펫을 밟으며 전 세계를 주름잡는 글로벌 리더로서의 면모를 부각시켰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웃통을 벗어 던진 푸틴의 모습이 사라진 자리에 외교 스타 푸틴이 들어섰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크렘린궁이 공격적 외교로 국제 정책을 조정하는 러시아 지도자 상을 이번 달력에서 제시했다”고 전했다.
매해 연말 출시되는 푸틴 달력은 크렘린궁의 디자인 승인을 받아 전 세계에 출시되는 일종의 기념품이다. 올해 일본의 대형 잡화점 로프트에서 팔린 푸틴 달력이 각종 연예계 스타들의 달력보다 많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2019년 푸틴 달력에는 특히 반라(半裸) 차림의 푸틴 대통령 사진이 3장이나 들어갔다. 상의를 벗고 근육을 드러낸 채 냉수욕을 하거나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모습 등이다.
반면 내년도 푸틴 달력엔 반라 사진이 한 장도 포함되지 않았다. 12장 가운데 11장이 정장 차림이고, 대부분 주요국 정상들과 함께 한 모습으로 채워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거나(2월) 러시아를 방문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환하게 웃으며 대화하고 있는 모습(9월)이 실렸다. 레드카펫 위를 걸으며 이웃 국가에 들어서고 있는 사진(5월)도 눈길을 끈다.
크렘린궁이 푸틴 대통령의 이미지에 변화를 준 것은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과거 달력이 강력한 러시아 대통령의 면모를 담아냈다면, 이번엔 한층 올라선 국제사회에서의 러시아의 지위를 강조한 셈이다.
실제 올해 러시아 외교는 화려했다. 미군 철수로 불거진 시리아 사태 속에서 터키와 쿠르드족 간 분쟁에 적극 개입해 휴전을 끌어냈다.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쿠르드족)을 버린 지도자로 비난받는 동안 푸틴 대통령은 중재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한 셈이다. 또한 자국산 지대공 방어 미사일 체계인 S-400을 미국의 전통적 우방인 터키와 인도에 수출하며 무시 못 할 수준의 대미(對美) 견제 외교력도 과시했다. WP는 “소득 불평등 문제로 푸틴의 인기는 예전만 못하지만, 그의 외교활동은 러시아인들의 큰 지지를 받고 있다”며 “푸틴 대통령의 이미지 변신은 크렘린궁으로서 해볼 만한 베팅”이라고 평가했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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