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무 관련성ㆍ공소시효에 발목…“부실 수사” “무리한 기소” 분분
검사ㆍ스폰서 직무관련성 판단 기준 의문도 제기돼
카메라를 피해 고개를 돌리는 여성을 껴안고 노래를 부르다 성관계를 갖는 한 남성. 2013년 초 한 영상이 법조계와 정치권에 떠돌기 시작합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른바 ‘원주별장 성접대 동영상’입니다. 이 1분 40초 분량의 영상이 도화선이 돼 경찰이 내사에 착수하면서, 영상 속 남성으로 지목된 김학의 당시 법무부 차관은 취임 6일 만에 불명예 사퇴하게 됩니다.
이후 김 전 차관은 성폭력처벌법상 특수강간과 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로 2013년, 2014년 두 차례의 수사를 받았지만 검찰의 증거불충분에 따른 불기소 처분으로 재판을 면했습니다. 하지만 동영상 속 남성과 너무도 유사한 인상착의 때문이었을까요? 검찰 출신인 그에 대한 ‘면죄부 수사’라는 비판과 함께 의혹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지난 3월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 권고로 다시 특별수사단 수사를 받게 된 김 전 차관은 스폰서인 건설업자 윤중천씨 등으로부터 수억대 금품과 성접대 등 향응을 받았다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로 최초 논란 이후 6년 만에 결국 구속기소 됐습니다. 그리고 지난 22일 드디어 열린 1심 선고공판. 법원은 성접대 동영상·사진 속 남성을 김 전 차관이라 판단하고 금품 등을 받은 사실도 인정했지만 결론은 ‘무죄’였습니다. ☞관련 기사 “입증 안 돼” “증거 부족”…김학의 ‘시간이 준 무죄’
◇“동영상 김학의 맞다” 법원 판단 근거는?
이번 선고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성접대 사진 증거와 관련해 판결문 각주에 명시된 ‘원주별장 동영상’ 속 인물에 대한 판단이었습니다. 성접대 부분은 공소시효가 지나 유ㆍ무죄 판단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법원이 별도로 짚은 것으로 보입니다. 2013년 의혹이 제기된 후 김 전 차관은 “동영상 속 인물은 내가 아니다”라고 강하게 부인해왔는데요, 결심공판에서는 “원주별장에 간 기억이 없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죠.
하지만 법원은 1심 판결문에서 ‘그가 맞다’고 쐐기를 박았습니다. ☞관련 기사 법원 “사진ㆍ동영상 속 인물은 김학의…성접대도 받아”
법원은 먼저 서울 강남구 역삼동 오피스텔에서 촬영된 성접대 사진과 관련해 “사진상 남성은 김 전 차관이라고 봄이 상당하고,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지극히 합리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습니다. △윤씨와 사진 속 여성의 진술 부합 △김 전 차관 당일 기사 사진 비교 △얼굴형·이목구비·안경모양 일치 등이 근거가 됐는데요. 특히 사진이 윤씨가 자신의 조카에게 따로 김 전 차관 장면 추출을 지시한 CD에서 발견됐고, 바로 이 CD에 ‘원주별장 동영상’이 김 전 차관의 이름 영문자를 조합한 ‘khak’로 저장돼있었던 점을 들어 “사진과 동영상의 인물은 같은 인물이라 보는 것이 상당하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김 전 차관은 측은 그간 이 사진과 관련해 “촬영 당시 자택에 있었다”, “사진 속 남성과 가르마 방향이 다르다”며 동일인이 아니라고 주장해왔습니다. 법원은 이에 대해서도 “관용차 운행일지에 사실과 다른 기재가 다수 발견됐고 물리적으로 이동이 불가능하지 않다”, “가르마 방향은 사진을 촬영·저장·이동하는 과정에서 좌우반전으로 저장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성 접대에 수억 금품까지 받았는데 무죄라고?
검찰은 2006년 중순부터 2007년 말까지 13회에 걸쳐 이뤄진 김 전 차관과 여성들의 관계를 성폭력이 아닌 성접대로 봤습니다. 그런데 동영상과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이 김 전 차관이라는 게 분명하고, 진술과 계좌 추적 등의 증거로 성접대를 넘어 금품을 받은 사실이 인정되는데도 왜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걸까요?
여기서 나오는 키워드가 ‘직무관련성’과 ‘공소시효’입니다. 재판부는 공소시효가 남아있는 부분은 직무관련성이 입증되지 않아 무죄로 판단되며, 이전 사건은 면소(공소권이 없어져 기소를 면했다)됐다고 봤습니다.
먼저 재판부는 윤씨가 김 전 차관과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맺었던 A씨의 전세보증금 1억원 채무를 면제해준 것이 뇌물에 포함된다는 검찰 주장과 관련해 ‘너는 학의 형 때문에 봐주는 것이니 내가 부르면 오라’ 등의 말을 한 점을 들어 “확정적으로 채무면제의 의사표시가 있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봤습니다. 이 과정에서 윤씨가 김 전 차관에게 ‘나 어려운 일 생기면 형도 도와달라’고 말한 부분도 막연하고 추상적이라 직무와 관련한 부정한 청탁이라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죠.
또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윤씨로부터 검사장 승진 축하금과 그림, 의류 등 3,100만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부분과 관련된 판단도 엇갈렸습니다. 검찰은 김 전 차관이 윤씨에게 측근을 통해 지인 형사사건 진행 상황을 알려준 정황이 뇌물로서의 대가성을 입증할 증거라 봤지만 법원은 달리 본 것이죠. 실제 김 전 차관 등을 통해 전달된 ‘아직 결정이 안 됐고 검토 중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정보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형사사건에 연루될 경우의 영향력 행사를 대가로 주식회사 대표이사로부터 5,160만원 상당, 저축은행 회장으로부터 1억 5,500만원 상당의 금품을 받았다는 부분도 범죄 사실에 포함됐는데요. 법원은 이 또한 공소시효가 지났거나 직무관련성이 뚜렷하게 입증되지 않았다고 봤습니다. 법원은 이처럼 공소시효가 남아있는 부분은 무죄로 판단되고, 이외의 부분은 1억 원 이하의 뇌물로 10년이란 공소시효가 지났으므로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이 때문에 2006~2007년까지 이뤄진 성접대에 대한 부분은 유·무죄 판단조차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공소시효를 두고 고심하던 검찰은 여러 범죄 행위를 연속선상에 있는 하나의 사건으로 판단하는 ‘포괄일죄’를 적용, 범죄 액수를 키워 시효를 늘리고 마지막 범행 시점부터 계산하는 전략을 선택했지만 결과적으로 법원에선 받아들여지지 않은 셈입니다. ☞관련 기사 ‘1억 뇌물’ 카드 무산에…공소시효 벽에 막힌 김학의 처벌
◇부실 수사일까, 무리한 기소일까?
왜 앞선 두 차례 수사에서는 김 전 차관이 기소조차 되지 않았을까요? 2013년, 2014년 두 차례 수사에서 성폭력처벌법상 특수강간, 카메라 등 이용촬영 혐의에 대해 검찰은 모두 증거불충분 혐의 없음으로 불기소 판단을 했습니다. 불기소결정문에 따르면 △피해자 진술 번복으로 인한 신빙성 부족 △피해자들이 윤씨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온 점 △과거 다른 촬영에 동의한 적이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 성범죄로서의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법조계에서는 ‘부실 수사’라는 주장과 ‘무리한 기소’라는 목소리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참여연대는 이번 판결과 관련해 “검찰 수사와 기소가 부실했고 공소유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제식구 감싸기와 늑장수사로 일관해온 검찰에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성명을 냈습니다.
‘원주별장 동영상’으로 촉발된 이 사건을 처음부터 성폭력이 아닌 성접대와 직무관련성에 초점을 맞춰 뇌물죄로 수사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됩니다. 앞서 두 차례 수사 모두 이 사건 자체를 검사와 스폰서 간 뇌물이 아닌 성범죄로 접근했다는 논리죠.
그러나 이전 수사팀은 “당시에도 뇌물죄에 대한 검토는 이뤄졌고 대가성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입장입니다. 애초에 직무관련성과 대가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찾기가 어려웠다는 것이죠. 이번 선고에서도 이 부분이 인정되지 않으면서 여론의 압박에 무리하게 기소를 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옵니다.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김 전 차관 사건을 담당했던 박준영 변호사는 26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제3자 뇌물수수에 대한 판단을 보며 특수단이 정치와 여론의 압력 때문에 어떻게든 김 전 차관을 기소해야 한다는 결론을 정해놓고 윤씨와 여성의 진술을 끌어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이번 판결은 직무관련성 판단 잣대에도 의문을 던지게 합니다. 관계 특성상 스폰서는 검사가 언제 자리를 옮겨 향후 자신이나 주변 사건에 영향력을 행사할지 모른다는 점을 고려해 미리 관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대개 검사 본인이 담당한 사건을 직접 봐주기보다는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이뤄지기도 합니다. 한 현직 부장검사는 “김 전 차관과 윤씨는 명백한 스폰서 관계인데도 직무관련성이 인정되지 않아 무죄라면 앞으로 검사들이 돈을 받아도 된다는 것인가”라며 “검사의 스폰서를 용인해주는 판결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유지 기자 mainta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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