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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만나다] 악바리 여검객 전희숙이 꼽은 펜싱에서 중요한 세 가지

입력
2019.11.28 04:4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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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아시아 최강 전희숙과 소녀 검객 홍세인 

 ※ 어린 운동 선수들은 꿈을 먹고 자랍니다. 박찬호, 박세리, 김연아를 보고 자란 선수들이 있어 한국 스포츠는 크게 성장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여전히 스타의 발자취를 따라 걷습니다. <한국일보>는 어린 선수들이 자신의 롤모델인 스타를 직접 만나 궁금한 것을 묻고 함께 희망을 키워가는 시리즈를 격주 목요일 연재합니다.

여자펜싱 플뢰레 에이스 전희숙(왼쪽)과 여고생 유망주 홍세인이 지난달 30일 서울 송파구 서울시청 펜싱팀 연습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여자펜싱 플뢰레 에이스 전희숙(왼쪽)과 여고생 유망주 홍세인이 지난달 30일 서울 송파구 서울시청 펜싱팀 연습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선배님께 궁금한 게 많았는데, 다 답해 주실 거죠?”

아시아 최강 ‘왼손 여검객’ 전희숙(35)과 18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고교 후배 홍세인(17ㆍ중경고2년)이 서울 송파구 서울시청 펜싱팀 연습장에서 만났다.

전희숙은 ‘땅콩 검객’ 남현희(38)와 함께 2010년대 대한민국 여자 펜싱을 이끌었다. 남현희가 지난달 100회 전국체육대회를 끝으로 은퇴한 지금, 전희숙이 ‘국가대표 전력의 절반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2014 인천ㆍ2018 자카르타-팔렘방 등 아시안게임 2연패,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 은메달 등 전적이 화려하다. 홍세인 역시 지난 4월 세계청소년펜싱선수권에서 플뢰레 개인전 은메달, 지난달 전국체전에서는 여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유망주다. 홍세인은 “선배가 최고의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겪었을 수많은 선택과 과정 하나하나가 모두 궁금하다”며 휴대폰에 메모해온 질문 보따리를 풀어놨다.

국가대표 전희숙(왼쪽)과 홍세인. 이한호 기자
국가대표 전희숙(왼쪽)과 홍세인. 이한호 기자

육상으로 운동을 시작한 전희숙은 중학교 2학년때 펜싱을 처음 접했다. 전희숙은 “어린 마음에 검을 휘두르는 펜싱이 정말 신기했다”면서 “육상이 너무 힘들기도 했거니와, 펜싱 장비도 멋있어서 호기심으로 시작한 게 여기까지 왔다”며 웃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다. 딸이 손에 칼을 쥐는 것도 마뜩지 않거니와 부상 위험도 적지 않았기 때문. 그러나 검을 잡은 지 3년 만인 고1때부터 서너 살 언니들을 이기기 시작했다. 전희숙은 “악바리 근성 때문인지, 남들보다 빨리 ‘이기는 맛’을 알았다”면서 “성적이 좋아지면서 부모님도 나를 믿어주셨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펜싱 규칙에 변화가 생기면서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바뀐 규정은 전희숙처럼 힘과 높이로 압도하는 선수보단 치고 빠지는 기술 유형의 선수에게 유리했다.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성적이 확 떨어졌다. 심지어 떼놓은 당상이던 국가대표 선발전에도 탈락했다. 2008년에는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실의에 빠져 체육관에 나오지 않은 채 밖으로만 떠돌았다. 50㎏ 후반이던 체중이 10㎏이나 불었다. “다시는 칼을 잡지 않을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런 전희숙을 끝까지 믿고 붙잡아준 건 어머니와 조종형 감독(현 대한펜싱협회 부회장)이었다. 전희숙의 모친은 매일 빈 숙소에 와 딸을 기다리다 급기야 쓰러져 입원했다. 전희숙은 “엄마가 병상에서도 ‘난 널 믿는다. 딱 1년만 더 해보자’고 설득하셨다”면서 “엄마마저 잃는 불효자가 될 순 없어 다시 검을 잡았는데 조금씩 성적을 회복했다”라며 엷은 웃음을 지었다.

전희숙(왼쪽) 선수가 홍세인의 자세를 교정해주고 있다. 이한호 기자
전희숙(왼쪽) 선수가 홍세인의 자세를 교정해주고 있다. 이한호 기자

펜싱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3가지를 물었다. 전희숙은 가장 먼저 ‘독기’를 꼽았다. 전희숙은 “평소 성격이 독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승부에서 독해야 한다는 뜻”이라며 “피스트(펜싱 경기를 하는 대) 위에서 독기를 품어야 한다”고 했다. 두 번째로 ‘기본기’였다. 다른 종목도 그렇지만, 특히 펜싱은 기본기를 잘못 배우면 향후 수정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이유였다. 마지막으로 ‘끈기’를 꼽았다. 같은 동작을 수천 수만 번 반복해서 몸에 완전히 익혀야 한다. 그래야 승패를 가르는 0.001초 동안 상황을 정확히 판단해 반사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게 전희숙의 설명이다.

한국 최고의 여검객도 존경하는 선배가 있었을까?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영호(48) 로러스 펜싱클럽 총감독이 그의 롤모델이었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이후 100년이 넘도록 펜싱은 유럽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던 것을 김영호가 104년 만에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 플뢰레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전희숙은 “내가 딱 세인이 나이(당시 16세)였다”면서 “당시 TV를 통해 결승전을 지켜봤는데, 김영호 선배가 큰 키의 러시아 선수를 상대로 대역전극을 펼쳤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나와 같은 왼손잡이인 김영호 선배를 보면서 울컥하는 마음에 ‘나도 저 자리까지 가보고 싶다’고 꿈을 키웠다”면서 “이제는 나를 보고 꿈을 키운다는 세인이를 위해서라도 더욱 분발해야겠다”며 웃었다.

전희숙(오른쪽)이 홍세인의 질문 목록을 함께 살펴보며 웃고 있다. 이한호 기자
전희숙(오른쪽)이 홍세인의 질문 목록을 함께 살펴보며 웃고 있다. 이한호 기자

소녀 검객은 부끄러워하며 마지막 고민을 꺼냈다.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될까요? 각종 대회를 쉴새 없이 연이어 치러야 하는데, 경기력에 지장은 없을까요?”. 이에 전희숙은 “오히려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전희숙은 “힘든 고비가 종종 있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또 다른 힘을 얻을 수 있다”면서 “든든한 심리적 우군이 있다는 건 중요해. 오히려 남자친구 사귀는 것을 추천한다”고 했다. 다만 조건을 달았다. 전희숙은 “지금은 진학(대학)도 해야 하고 기본기를 다져야 하는 중요한 시기다. 조금만 참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에 홍세인은 “지금은 없다”며 “엄마가 ‘대학 가면 생긴다’고 하시기에 기다리고 있다. 대학 가서는 꼭 사귀어보고 싶다”며 볼을 붉혔다.

전희숙의 눈은 이제 2020 도쿄올림픽으로 향한다. 자타 공인 ‘아시아 최강자’이지만 아직 올림픽 메달과 인연이 없다. 특히 2016 리우올림픽 16강에서 오심 논란 끝에 당한 눈물의 판정패를 설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알제리ㆍ이탈리아 대회 등 내년 4월까지 이어지는 각종 투어에서 올림픽 포인트를 쌓아야 한다. 전희숙은 “나이도 적지 않아 이번이 마지막 올림픽이라는 각오로 나섰다”며 “리우에서의 아쉬움을 도쿄에서 꼭 풀겠다”고 다짐했다.

강주형 기자 cubi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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