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필 무렵’ 노규태 역… 페이소스 주며 신스틸러로
‘의자에 걸려 넘어진’ 상황까지 계산… 치밀한 준비로 살린 웃음
“규태로 위로 받아… 저마다의 ‘거울’이지 않았을까요?”
‘노규태를 옹산군청으로’. 이 문구가 새겨진 어깨띠를 두른 여성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엉겁결에 같이 인사를 하고 둘러보니 어깨띠 다른 면엔 ‘이루지 못한 꿈’이란 더 절절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선거철 지하철역 등에서 스쳐 갔던 선거운동원과의 만남이 아니다. 26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연예기획사 프레인TPC 사무실. ‘옹산군청장 선거 유세’는 오정세(42)가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못다 이룬 꿈을 위해 그의 소속사가 배우 종방 인터뷰에 맞춰 준비한 이벤트였다. 오정세는 드라마 속 가상의 도시 옹산에서 군수가 되려는 헛된 꿈을 꾸는 노규태를 연기했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노규태가 남긴 ‘짠내’는 곳곳에서 쉬 가시지 않았다. 인터뷰가 끝난 뒤엔 땅콩이 ‘서비스’로 나왔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 규태가 술집을 운영하는 동백(공효진)에게 결국 한 번도 서비스로 받지 못한 그 주전부리였다. “저 땅콩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요.” 오정세가 웃으며 말했다.
오정세는 ‘동백꽃 필 무렵’의 ‘웃음 치트키’였다. 궁상맞은 연기로 마음이 궁색한 캐릭터의 맛을 잘 우려냈다. 드라마에서 규태는 겁에 질려 몸을 잔뜩 부풀린 두꺼비 같았다. 인정받고 싶어 늘 과장된 말과 옷차림을 하고 사람을 대했다. 집 혹은 사회에서도 투명인간 취급받는 이의 몸부림이었다. 존재감을 찾지 못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구걸했다. “왜 나한테는 밥 먹으라고 안 해?” 규태에게 자신에게 늘 냉담한 향미는 ‘야속한 당신’이었다. 그런 규태에게 땅콩은 결핍의 상징이었다.
규태가 준 페이소스는 우연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규태의 헛헛함을 더 쓸쓸하게 한 건 오정세의 치밀한 준비 덕이었다. 오정세는 바지 허리춤의 칸을 덜 채워 벨트를 맸고, 흰색 바지에 빨간색 속옷을 입었다. 오정세가 “규태의 비어있음을 표현하고 싶어” 준비한 스타일이었다. 규태가 극에서 학생으로 나올 때 바지 뒷주머니에 쓸려 나온 ‘세탁소 이름표 태그’도 준비된 ‘장치’였다. “멜빵을 했는데도 벨트를 차요. 투머치(과함)로 규태의 우스꽝스러움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스타일리스트에게 옷 구겨짐을 펴달라는 게 아니라 구겨짐을 유지해달라고 부탁했고요.” 방송 초반 온라인에선 규태가 자신에겐 식사를 권하지 않은 동백에게 토라져 화를 내고 술집을 나갈 때 의자에 걸려 넘어진 장면이 ‘짤(영상클립)’로 돌며 화제를 모았다. 엉뚱한 규태의 모습에 용식(강하늘)과 향미(손담비)가 온 힘을 다해 웃음을 참는 모습이 짧게 방송에 나간 탓이다. 규태가 넘어지는 상황도 그가 계산해둔 연기였다. 오정세는 규태를 자신의 경험에서 찾았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다섯 살 된 아이가 껌을 훔쳤는데 가랑이 사이에 끼고 주춤주춤 걷는 거예요. 나쁜 짓을 해도 속이 다 드러나는 거죠. 그 모습에서 규태를 찾았어요.”
비단 규태뿐만이 아니다. 오정세는 코믹 연기에 소문난 배우다. ‘주접 연기’는 그의 전매특허였다. “잤지? 잤냐고!” 오정세는 다른 남성 집에 찾아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와의 ‘핑크빛’을 노골적으로 의심하며 질투(영화 ‘남자사용설명서’)했고, 욕으로 점철된 차진 ‘구강액션’(영화 ‘극한직업)은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그런 그에게도 노규태는 각별했다. “노규태를 연기하며 저도 위로 받았어요. 제 소심한 성격상 주위에서 ‘좋은 작품 해서 좋겠다’ 물으면 ‘아니야’라고 답했는데 이번엔 ‘어, 잘 누리고 있어’라고 대답할 정도였으니까요. 시청자분들이 규태를 통해 웃고 우는 건 규태가 저마다의 거울 같아서가 아닐까 싶어요.”
오정세는 올해 세 편의 드라마를 찍었고, 두 편의 영화로 관객을 만났다. 1997년 영화 ‘아버지’로 데뷔해 2008년 영화 ‘똥파리’까지 10여 년을 단역으로 살았던 오정세는 요즘 ‘신스틸러’가 돼 스크린과 안방극장에서 믿고 찾는 배우로 성장했다. 올해 쉴 틈 없이 달려온 그는 내달 드라마 ‘스토브리그’ 방송도 앞두고 있다. 규태와는 180도 다른 악역이라고 한다.
“크게 어떤 역을 해야지 계획하는 편이 아녜요. 집 문 열고 나가면 여러 사람을 만나듯 작품도 자연스럽게 만나 인연을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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