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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하비 밀크와 조지 머스코니(11.27)

입력
2019.11.27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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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밀크(왼쪽)와 조지 머스코니가 1978년 11월 27일 숨졌다. AP 연합뉴스
하비 밀크(왼쪽)와 조지 머스코니가 1978년 11월 27일 숨졌다. AP 연합뉴스

미국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지낸 진보 정치인 조지 머스코니(George Moscone, 1929~1978)가 1976년 샌프란시스코 시장이 됐고, 이듬해 치러진 샌프란시스코 시의회(Board of Supervisors) 선거에서는 정원 11명 가운데 6명이 친기업 진영의 보수계 인사가 당선됐다. 그들 중 한 명이 경찰ᆞ소방 간부 출신의 댄 화이트(Dan White)였고, 진보 진영의 친 시장파 진영의 대표적 인물이 하비 밀크(Harvey Milk)였다. 화이트 진영은 6대 5의 우위로 78년의 동성애자 인권 조례 등 머스코니의 시정에 시종 딴죽을 걸었다.

배우 숀 펜에게 2009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밀크’로 잘 알려진 하비 밀크는 미국 최초의 게이 정치인이자 동성애자 인권 운동의 상징적 존재다. 뉴욕에서 태어나 연인과 함께 72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그는, 적극적인 게이 활동가로 이름을 날리며 시 의회 선거에 출마, 3차례 낙선 끝에 당선됐다.

화이트는 공직자 겸직 금지 조항에 따라 급여가 더 많던 소방 간부직을 포기하고 의원이 된 경우였다. 하지만 자신이 경영하던 레스토랑 사업마저 어려워지자 78년 11월 10일 의원직을 사임했다. 지역 상공업자들이 그를 붙잡았다. 의회의 힘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그가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금전적 후원을 약속하며 사임 포기-시장의 재임용을 촉구했다. 하지만 머스코니는 화이트의 청을 외면했다.

11월 27일 화이트는 38구경 스미스앤웨슨 권총을 휴대한 채 금속탐지기까지 교묘하게 피해 시 청사에 진입, 머스코니와 밀크를 저격했다. 특히 밀크에게는 가슴에 3발, 머리에 한 발을 쏜 뒤 마지막 한 발로 확인사살까지 했다.

주 검찰은 화이트를 1급 살인(murder)이 아닌 2급 고살(manslaughter) 혐의로 기소, 선고공판이 열린 이듬해 5월 캘리포니아의 동성애자와 시민들이 폭동으로 저항(White Night Riots)하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 역사상 시민들이 가장 경멸한 인물”로 꼽은 화이트는 84년 가석방됐다가 1년여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영화 ‘밀크’ 개봉 직후 버락 오바마는 하비 밀크에게 대통령 자유 메달을 추서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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