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 북미 실무협상 이후 최근까지 연이은 담화를 통해 북한이 안전 보장(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응은 의아함과 의구심이 지배적이다. 왜 갑자기 협상의 문턱을 높였냐, 협상 의지가 과연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상기할 것이 있다. ‘역사적인’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합의문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안전 보장 제공을 약속하였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단호하고 확고하게 한반도에서의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하였다.” 안전 보장과 비핵화가 큰 틀의 교환 구도임을 두 정상은 이미 합의했다.
안전 보장이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제공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명시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북미정상 합의문으로 보면, 북한의 안전 보장 요구는 비상식적인 것도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이런 요구에 미국이 최소한 부인하지 않는 이유는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린 지금 북한의 ‘안전 보장’ 요구에 화들짝 놀라는 것일까. 물론 우리의 안전 보장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도 있지만, 여기엔 북한이 한몫했다. 안전 보장의 하위 아이템인 ‘종전 선언’이나 ‘대북 제재 해제’ 요구에만 집중하며 전체 프레임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미국의 ‘정치적 부담’을 고려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안전 보장은 망각되고 ‘대북 제재 해제’로만 북한의 요구는 협소화됐다. 물론 북한엔 대북 제재 해제가 가장 절실하다. 초기에 종전 선언에 매달렸던 것도 북미 사이 적대적 관계의 종식을 국제 사회에 알림으로써 대북 제재 해제의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좀 더 영악했다면, 합의한 ‘안전 보장 대 비핵화’의 큰 우산을 펼친 속에서 각론적 아이템을 운용했어야 했다. 뒤늦은 협상 틀 바로잡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북한이 내놓은 ‘연말 시한’ ‘새로운 전략들’ 그리고 ‘새로운 길’에 주목해야 한다. 대미 압박용 차원도 있지만, 그 이상의 복잡성이 내장돼 있다. ‘연말 시한’은 북한 내부적으로 최고지도자가 설정한 방침이자 지상 명령이다.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 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제시했기 때문이다. ‘웅대한 전략’ ‘새로운 전략’ ‘새로운 길’과 같이 일대 ‘전환’을 지시하는 용어들도 지도자의 ‘승인’ 내지 직접 지시 없인 사용하기 힘들다. ‘계획’ 없이 ‘속임수’로만 등장하기 힘들다.
최근 북한이 전방위적으로 일련의 담화들을 쏟아내는 것은 김 위원장의 ‘방침’과 ‘명령’을 받들고 체면을 관리하기 위한 ‘총력전’ 차원에서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제7기 3차 당 전원회의를 통해 새로운 전략 노선을 제시했다. 경제 발전 총력 집중, 국제 관계 개선, 안으로 개혁 조치다. 사실상의 북한식 개혁ㆍ개방 천명이다. 김정은 시대의 국가주의와 실용주의다. 그러나 필수적인 안전 보장과 개혁ㆍ개방이 북미 협상 답보와 대북 제재로 완전히 발이 묶인 상태다. 통치 리스크가 커질수록 ‘새로운 길’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다. ‘연말 시한’을 북한의 ‘자의적 설정’이라고 무시해선 안 되는 이유다.
‘새로운 길’은 고정된 하나의 길이 아닌 필요한 옵션과 조치를 추가해 가는 단계적 진화의 길일 수 있다. 다만 ‘적정 행동 공간’이 있을 수 있다. 핵실험ㆍ중장거리 미사일 중단 유지, 북미 경색 평화적 장기화, 남북관계 긴장도 유지, 중러 군사협력 편승ㆍ활용, 단거리 및 전술무기 개발 지속 등이다. 북미 대치 장기화 모드로의 전환, 중ㆍ러 군사 협력에 편승한 핵 보유 상태의 장기화다. 슬기로운 연말 관리 전략이 필요하다. 대화 재개의 ‘명분’과 셈법 변화의 ‘힌트’를 줄 필요가 있다. 내년 한미 연합 훈련 조정, 북한의 안전 보장 우려에 대한 공감 표시다. 한국은 남북 관계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변화 모색, 실용적 한미 동맹 및 한미 연합 훈련의 새로운 모델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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